함박눈이 쏟아지는 거리를 혼자 걷는다. 누구를 만나지도, 눈사람을 만들지도 않는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 새로 나온 음료수뿐이다. 갑작스레 등장한 행인이 말을 건다. “학생이세요?” 놉. 나는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신상털이. 마시즘이다.
윈터 비어, 겨울에 맥주가 웬 말?
참으로 기이한 사람이다. 그는 나를 쫄쫄 쫓으며 로드무비라도 찍으려나 보다. 나는 학생도 아니고, 이 동네 지리도 모른다고 했건만. 대화 주제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의 관심은 결국 내가 들고 있는 비닐봉지로 옮겨갔다.
“이게 뭐예요?”
“맥주요.”
“여름도 아닌데 무슨 맥주를 마셔요?”
잠깐.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미리 밝히는 것인데 나는 맥주 중독자가 아니다. 심지어 맥주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맥주가 가장 맛있을 계절이기에 지나칠 수 없었던 것뿐이다. 참고로 맥주가 맛있는 계절은 누가 뭐라 해도 겨울. 그리고 봄, 여름, 가을이니까.
여기 눈사람 보이시죠? 눈 오면 마시라는 거예요
눈이 올 쯤이면 다양한 브루어리에서 겨울 한정 맥주를 만든다. 내가 산 ‘윈터 비어(Winter Beer)’ 역시 겨울에만 파는 한정판 맥주다.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윈터 비어를 만든 곳은 독일의 아이히바움(Eichbaum) 브루어리. 우리말로 떡갈나무 양조장이다. 양조장 이름부터 겨울 산장이 떠올라 재빨리 구매. 가격은 2,500원이다.
여전히 행인은 나를 따라오며 말을 한다. OB와 카스, 하이트가 맥주삼분지계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다. 그의 눈에 이런 윈터 비어는 변방, 오랑캐, 엑스트라 원투 하는 맥주겠지? 하지만 윈터 비어는 포장만 그럴싸한 게 아니다. 맛도 겨울 맞춤형으로 나왔다고요.
윈터 워머, 겨울 맥주의 또 다른 이름
나의 뇌는 잠시 한귀한귀(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모드가 되었다. 내 눈에는 그저 윈터 비어를 꼴깍 마시는 내 모습이 연상될 뿐이다. 하얀 설원에서 잔으로 옮겨가는 윈터 비어의 붉은 곡선. 차오르는 맥주 위에 눈처럼 쌓인 부드러운 거품.
그 거품을 가르고 맥주를 들이켠다. 당도 높은 쌉쌀함이 마음의 따뜻하게 만든다. 정신을 차려보니 행인은 ‘겨울에는 소주’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잠깐, 소주라니요. 맥주는 여름에는 차가우려 마시는 거지만, 겨울에는 따뜻하려고 마시는 건데.
윈터 비어를 비롯한 겨울 맥주를 부르는 다른 이름은 ‘윈터 워머(Winter Warmer)’다. 기존 맥주의 알코올도수(4%)보다 높아 속을 따뜻하게 데워주기 때문이다. 윈터 비어의 알코올도수는 5.8%지만 심한 겨울 맥주는 알코올도수가 10%도 넘는다.
겨울 맥주의 맛: 날이 추울수록, 맥주는 익는다
한없이 떠들던 그도 결국 갈 길을 떠났다. 날씨도 추운데 소주 이야기를 했으니 어디 반주라도 하는 것일 테다. 나는 안다. 나 또한 그와 걸으며 윈터 비어에 대한 이야기를 되새김질했더니 이 맥주가 너무 마시고 싶거든. 우리는 서로 기분 상할 틈도 없이 발걸음을 바삐 재촉한다.
흰 눈이 수북이 쌓인다. 찬 바람은 어제보다 강하게 몰아친다. 하지만 우리가 옷깃을 여밀수록 윈터 비어의 맛은 더욱 풍부해지겠지?
원문: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