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로는 뭘 해도 안 되는 시대
지금 이 글을 클릭하여 한 번 읽어보겠다고 마음먹은 그대. 시, 읽는가? (그럴 리가…)
시로는 뭘 해도 안 되는 시대이다. 찾아 읽는 이들은 없고, 지하철 안전문 앞에 붙어 있어서 읽고, 화장실 벽에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류의 글과 함께 배치된 것이나 읽지, 한 명의 시인이 펴낸 시집을 읽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좀 깨었다는 교사들이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같은 시집을 학창시절에 억지로 읽히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만, 사람들이 시를 더 이상 읽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 시대다. 시를 영화화해서 문화 콘텐츠로 만들기도 어려우니 딱히 돈도 안 되고, 사람들이 시에서 더 이상 별 재미도 감동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겠지.
이런 시대에 대체 인터뷰어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박근혜와 문재인, 문재인과 박근혜라는 두 유력 대선 후보들에게 암송할 수 있는 시를 묻다니. 아무도 안 읽는 시를, 왜 대선 후보들에겐 강요하는 거냐. 문학을 사랑하는 민초로서 기뻐해야 하는 거냐. 여하튼 간에, 그들은 다행히도 암송할 수 있는 시가 있었다.(물론 미리 준비했겠지만) 박근혜 후보는 킴벌리 커버거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을, 문재인 후보는 윤동주의 ‘서시’를 꼽았다.
인간이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자신의 기호를 반영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 인간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어떤 대상을 선호하는가는 어떤 대상을 배제하는가와 다름이 아니다. 결국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전을 (필자는 결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난 서정적 인간이니까) 바닥까지 드러내준다. 지금부터 이 대선 후보들이 암송할 수 있고, 애송할 것으로 추측되는 두 편의 시를 가지고 그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두 작품을 캠프에서 전략적으로 선택해줬을 수도 있다만, 여기서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2. 애송시, 다들 있으시죠?
한국 현대시 성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2012년 1월 KBS 1TV에서는 국민 애송시 설문조사를 했다. 1만 8298명이 인터넷과 우편엽서, 면접(!)을 통해 참여한 ‘국민 애송시’ 설문 결과를 한 번 보자.
[note color=”#fffae5″]1위 김소월의 ‘진달래꽃’ (1557표)
2위 윤동주 ‘서시’(1377표)
3위 김춘수 ‘꽃’(667표)
4위 윤동주 ‘별 헤는 밤’(409표)
5위 천상병 ‘귀천’(372표)
6위 한용운 ‘님의 침묵’(288표 )
7위 이형기 ‘낙화’(282표)
8위 정지용 ‘향수’(244표)
9위 도종환 ‘접시꽃 당신’(220표)
10위 김소월 ‘초혼’(194표)[/note]
1위는 예상대로 ‘진달래꽃’이다. 마야가 목 터져라 부르는 대중가요이니, 노래방 가서 가창력 좀 뽐내본 이라면, 괴로워하며 그 노래를 들어본 이라면, 진달래꽃 정도는 다 안다. (물론 ‘애(愛)’하는지는 모르겠다.) 목록을 보시면 알겠지만, 교과서에 한 번쯤은 나온 시들이다. (모른다고 날 원망하진 마라, 본인이 학교를 그냥 다니기만 하신 건지도, 그건 자랑스러워할 만한 전력이다.) 학교 다닐 때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강제로 가르친 시라는 뜻이다.
문재인 후보가 애송한다는 ‘서시’도 2위에 올라있다. 윤동주의 ‘서시’는 비슷한 설문조사마다 늘 순위권 안에 들어 있는 시 작품이다. 이 사실만 확인하면 된다. 역시 문재인 그는 ‘대한민국 남자’다잉!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앞의 설문조사를 벌인 주체들은 시인들에게도 애송시 같은 걸 꼽게 한다. 결과는 아래와 같다.
[note color=”#fffae5″]1위 윤동주 ‘서시’
2위 김춘수 ‘꽃’
3위 한용운 ‘님의 침묵’
4위 서정주 ‘국화 옆에서’
5위 김소월 ‘진달래꽃’
6위 유치환 ‘깃발’
7위 박목월 ‘나그네’
8위 정지용 ‘향수’
9위 서정주 ‘동천’
10위 김수영 ‘풀’[/note]
오! 여기에도 있다. 윤동주의 ‘서시’. 윤동주의 ‘서시’는 시인들에게 조금 더 사랑받는 작품인 모양이다. 그들은 그 작품을 1위로 꼽았다. 시에 대해 나름 전문가 집단인 만큼, 전문가들에 의해 작품성도 인정받은 작품이 바로 윤동주의 ‘서시’이다. 오호라. 그런 시를 문재인은 좋아한다.
박근혜 후보가 애송한다는 시는 어떨까? 이 시는 류시화의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에 실려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 썼겠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 책에 수록되면서인 듯하다. 류시화가 쓰거나 번역한 저런 류의 시집들이 출간되기 시작하면서 시집 베스트셀러 부문을 독식(?)한 지 어언 수년째이고, 인터넷 공간에는 작가인 ‘킴벌리 커버거’의 이름보다는 ‘류시화’라는 이름과 연결되어 이 시가 떠돌아다니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튼 박근혜 후보가 언제부터 이 시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물론 아마 킴벌리 커버가 미국에서 이 시를 발표했을 때부터였겠지, 암, 그렇고말고), 대중에게 이 시는 류시화의 잠언시집 수록을 기점으로 알려지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가 있다.
물론 이 시의 원전이나 작가가 어떤 사람인가 등등에 대해서 잘 찾아볼 수도 있기는 하다만, 나는 영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찾아보기 귀찮다. 혹시 궁금하시면 찾아보시라. 난 별로 안 궁금하니까.
3. 시를 읽어볼까?
여튼 박근혜는 대중으로 낮게 임하시는 정치인답게, 사람들을 위해 쉬운 격언의 나열 같은 친절한 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을 암송할 수 있고, 문재인은 누가 ‘대한민국 남자’ 아니랄까봐 온국민의 애송시 ‘서시’를 암송할 수 있다. 다들 그 시들이 뭔지 궁금할 듯하여, 그 시를 싣는다.
[note color=”#fffae5″]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note]
박근혜 후보는 천재일 거다. 하긴 수석 졸업이라고 했었지. 이 시를 어떻게 암송하지? 내가 검색해 본 결과, 이 시 밖에 없었다. 킴벌리 커버거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은. 더 짧은 버전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이다!
여튼 간에 필자는 고등학생 시절, 독서 선생님의 한용운의 ‘임의 침묵’ 암기 숙제를 받고, 좌절감에 몸서리쳤고, 외운다고 피똥 쌌던 기억이 있다.(임의 침묵은 이 시보다 짧다, 단어는 어렵지만) 그런데, 이 시를 암송한다니, 그녀는 컴퓨터 두뇌일 것이다. (이씨, 눈물나게 부럽다)
아니면, 다소 특이한 기호의 소유자인지도.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게다가 짧은 시가 존재하는데, 왜 하필이면 이 시야? 한 줄짜리 시도 이 세상엔 존재한다. 유명하고 수준 있다고, 사람들이 ‘우와-’ 소리 들을만한 작품이면서, 쉽고 짧은 시도 많은데 굳이 이 시를 암송한다니. 정말 대한민국 1% 특별한 성격이거나, 지독히도 이 시를 좋아하는지도.
그렇다면, 더, 희한하다. 이 시의 주제를 한 줄로 줄여보자. 그냥 제목이 주제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조금 다르게 살겠다는 소망과 의지’ 정도? 제목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지금의 삶과 지금 아는 것들이 그때의 삶과 그때 아는 것들보다 행복하고 많다는 것이다. 오늘의 삶이 지금보다 나을 수 있다니. 주된 감정은 후회이지만, 후회를 바탕으로 더 좋은 삶, 이상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의 정서가 엿보인다.
이 시는 어렵지 않다. (물론 길어서 어렵게 느껴진다고 한다면, 뭘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다.) 문장에서 드러난 겉뜻이 전혀 다르지 않고, 연 구분의 당위성도 찾기가 어렵다. 물론 영시에서는 연을 구분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운율이라던가 하는 것 말이다. 그렇지만 번역된 이 시에서는 내용상 독립적이지도 않고, 굳이 연을 나눠 적은 이유가 와 닿지 않는다. 상징적 시어나 수사적 표현 같은 것이 도드라지는 시도 아니다.
이 시는 어떤 이의 일기장을 들춰본 것처럼 일상적인 글이고, 그렇기 때문에 쉽게 이해된다. 어떤 시 교육 연구자는 앞서 언급한 류시화의 시집이나, 시인들이 시를 가려 엮은 편집 시선집과 같은 대중 시의 유행 현상을 걱정 어린 시선으로 보기도 한 바 있다만, 여기서는 그것을 문제 삼기 어렵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피부에 와 닿는 편안한 시이고,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법한 생각이기 때문에 친숙하다.
이 시에서 시적화자가 소망하는 것은, ‘타인이 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시키는 즐거운 일을 하는 삶’, ‘부모가 날 사랑하는 것처럼 내 인생을 사랑하는 삶’, ‘사랑에 열중하는 삶’, ‘실수해도 용기 있게 저지를(?) 수 있는 삶’,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하는 삶’ 등이다. 이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아마 이런 삶의 모습에 대한 동경 때문에 이 시를 좋아할 것이다.
여러분은 이제 상상해 보면 된다. 앞에서 ‘’안에 넣어 필자가 소개한 그런 삶을 살기를 꿈꾸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어떨지. 물론 그가 국민이 이런 삶을 살도록 희생해 줄 수도 있다는 희망도 버려선 안 된다. 국민이 이 삶을 살게 희생하기 위해 이 시를 좋아하여 암송할 수도 있는 일이다.(그렇지만, 보통 인간은 이렇게 복잡한 이유로 어떤 대상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음 시를 볼까? 미리 말해두지만, 필자는 윤동주를 사랑한다. 윤동주는 잘생겼다.(-_-, 미안하다, 이유가 비루하다.) 이쯤에서 그의 단아하고 지적이며, 정갈히도 뻗은 콧날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진다. 사진을 찾는다.
윤동주의 서시는 다들 알겠지만, 형평성(!: 이미 필자가 윤동주빠이므로 망했지만) 차원으로다가 전문을 싣는다.
[note color=”#fffae5″]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note]
서시는 내용을 기준으로 세 개 정도로 나눌 수 있다. 1~4행에는 시적 화자가 지금까지 괴로워하면서 살아왔던 삶의 궤적을 이야기한다. 그의 괴로움의 원인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운 삶을 갈망했기 때문이었다. 순수하고 순결한 삶에의 결벽증은 삶을 피곤하게 만든다. 시적 화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힘들었다면, 나 이제 그만 하련다, GG, 할 법도 한데, 그는 5-8행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바, 소명을 실천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렇지만, 2연에서 드러나듯 여전히 별은 바람에 스치우고, 힘들고 어려운 현실적 난점들이 넘쳐난다.
이 시는 앞에서 살펴본 ‘지금 알고 있는 걸 지금도 알았더라면’에 비해서는 난이도가 있다. 우선 ‘별’, ‘바람’, ‘밤’, ‘하늘’ 등과 같이 초딩들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친숙한 시어들이 등장하지만, 그 의미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것과 다르게 구사된다. 상징적인 시어이기 때문이다. 상징적 표현이 돋보이고, 의지적이고 독백적인 독자를 내세우고 있는데, 시행과 연이 절제된 질서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형상화 수준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는 교과서에 실려 있다. 교과서에서 ‘윤동주’의 작품은 꼭 배우고 넘어가야 한다. 교과서 집필 시, 필자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윤동주 없네, 윤동주 없으면 안 돼.” 그만큼 윤동주의 ‘서시’는 ‘정전’으로 시로서의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다소 뻔하고, 일반적인 구석이 있다. 신선하지가 않다는 말이다.
이 시의 주제는 간명하다. ‘부끄럽지 않은 순결한 삶에 대한 희망’이 시의 주제다. 이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런 삶을 지향할 확률이 높다. 문재인은 이런 삶을 꿈꾸는 것인가? 과연 그는 그런 삶을 살아왔는가? 잘 모르겠다. 인간이 과연 이런 삶을 살 수 있기는 한가? 그리고, 이 시에서 드러나는 ‘나한테 주어진 길’, ‘소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고로,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4. 그래서?
인터뷰어는 특별히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지는 않은 모양인지, 그 이유를 짧은 인터넷 실력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그 이유를 만들어 넣어보았다. 명시하지 않았으나, 행간에 있으니, 다들 알았을 거다.
사실 두 편의 시 가운데, 사람들에게 쉽고 신선하고 친숙하게 다가갈 시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다. (물론 제목만 본 사람들은, ‘서시’일 것이다만) 그렇지만, 문학을 공부하는 그 언저리에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윤동주의 작품 ‘서시’가 시라는 갈래적 질서에 따른 언어의 구사, 형상화 수준, 상징성 등의 측면에서 훨씬 더 우수한 시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이 시를 선정한 문재인 후보가 우수하다는 것을 담보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박근혜 후보에게 애송시를 바꿀 것을 권유하고 싶다. 만약 나를 대선 캠프에 초빙해준다면, 그녀가 꿈꾸는 대한민국과 여성 대통령론에 어울리는 격조 높은 작품을 분골쇄신하여 찾아보겠다.
웃자고 쓴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문학이, 특히 시가 더 이상 무엇을 해주지 못하는 시대이다. 밥도 못 만들고, 돈도 못 만들고,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못 만든다. 많은 사람들은 서점에 놓은 소설과 시보다는 자기개발서, 주식 재테크 투자방법에 대한 서적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그걸 어찌 탓하랴. 그렇지만, 문학 치료라는 것도 있다. 의외로 문학을 수용하고 쓰는 일은,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마음에 맺힌 것들을 풀어내는 데에 쓰이기도 한다. 앞서 시는 시일 뿐 오해하지 말자고 했지만, 시는 또 의외로 많은 것들을 해낼 수 있는 것임을 김수영을 떠올리며, 사족처럼 붙이고자 한다. 선택은 어차피, 당신의 몫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