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도망치세요. 지금 당장.”
“혹시 주변에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가 있다면 피해야 하나요? 아니면 잘 타일러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범죄심리 전문 분석가로 경찰대 교수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이 한 시민에게 이런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해 한 답이다. 표 의원은 단호하게 말했다. “여러분은 절대 고칠 수 없습니다. 빨리 뛰어서 도망쳐야 합니다. 지금 당장.” 그는 덧붙였다.
“사이코패스인지 아닌지 여부는 전문가가 오래 관찰하고 조사한 후에야 알 수 있는 것이니 함부로 믿거나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는 극단적인 예지만 “주변에 이러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는데, 제가 그를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까요?”라는 고민을 많이 들어왔다. 에디터로 일하면서 연애 상담 코너를 썼던 적이 있는데, 그때도 대학생들에게서 자주 들었던 물음이었다. 질문을 계속 받다 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고칠 수 있을까?” 물을 때는 애초에 ‘(힘들기야 하겠지만) 노력하면 고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전제돼 있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있던 한 인간이 주변의 도움으로 ‘확 바뀌는’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다. 교육 프로그램에서는 밥을 먹지 않거나 집중력이 없거나 욕을 하는 등의 문제적 아이들이 전문가의 방문으로 환경이 개선되자 완전히 다른 모습이 나오곤 한다. 누군가의 고민에 대해 패널들이 어떤 조언을 한 후, 마지막에 상담자가 “달라지겠다”고 이야기해 박수를 받고, 주변인의 긍정적 인터뷰로 끝이 나는 예능도 꾸준하다. 성형과 다이어트를 시켜주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그 결과로 주인공 남편의 가정폭력이 없어졌다는 마무리를 보고 너무 극적인 전환이라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미디어에서 변한 누군가를 보고 신기해 하는 것은 편집되어 조작된 극적인 쇼일 뿐이다. 텔레비전과 책, 강연 등의 매체에서 ‘바뀌었다’고 하는 사람들의 리얼리티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또 실제 그렇다 하더라도 말 그대로 ‘고졸 신화’나 ‘고시 합격 수기’처럼 성공할 확률이 희박하기에 다룰 가치가 있는 뉴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스토리에 계속 노출되다 보니 ‘사람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계몽 내러티브’는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 평강공주 식의 이야기가 평범한 대부분의 인간을 괴롭게 하고 많은 경우에서의 인간관계나 조직문화를 망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강요나 계몽 같은 방식으로는 바뀌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달라지기로 결심하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해 극도의 노력을 해야만 바뀐다. 대단한 정신력이나 의지가 없는 보통의 사람들은 대부분 잠깐 개선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예전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나 그것이 금연이나 다이어트 수준의 습관 개선이 아니라 폭력성이나 우울증, 인격 장애 같은 그 사람 성격 전반을 결정하는 핵심 인격이라면?
애정과 노력으로 문제적 인간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은 아름답고 일견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분명한 진실은, 그것은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선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세상은 진보하면서 법과 복지 같은 시스템을 계속 보완해왔다. 현실을 뚜렷하게 보는 데는 어쩔 수 없다고 하는 적당한 체념이 필요하다. 원하는 대로 상황이 바뀌었을 때의 황금빛 미래만 보려고 하면 현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고등학교 때 내 짝이던 아이가 “남자친구가 배를 찼다”며 시퍼렇게 멍든 배를 교복 사이로 보여주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남자친구 몰래 친구들과 놀이공원에 놀러 갔다고 맞았다는 것이다. 짝은 헤어지라는 말에 “남자친구는 가끔 화가 나면 때리지만 그것만 빼면 좋다”고 했다. 그 아이는 “내가 잘하면 된다”고 했지만 이후에도 멍은 여러 곳에 골고루 생겨났다. 어떤 날엔 팔목에, 어떤 날에는 목에. 그 아이의 의지와 노력이 부족해서 그 남자를 고치지 못한 거였을까?
나의 경험에서도 비슷한 것을 배웠다. 심하게 집착하던 전 남자친구 앞에서 울기도 하고 빌기도 했다. 그는 그때마다 고치겠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내 휴대폰을 항상 몰래 봐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 관계는 끝이 났다. 또 다른 남자친구는 우울증이 있었고 나는 사랑하니까 고쳐주고 싶었다. 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와 만날수록 나까지 깊고 컴컴한 늪으로 몸이 잠겨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 사람 때문에 웃는 시간보다 우는 시간이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달았던 어느 날 우리는 헤어졌다.
상대를 ‘고치는 것’에 집착하다 보면 본인이 불행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상대가 약속을 어길 때마다 큰 싸움으로 번지고 다시 화해하는 무의미한 과정이 반복될 수 있다. 미움의 불똥이 상대를 고치지 못하는 자신으로 번지기도 하고, 무력해지거나 인간 자체에 대한 염세가 생기기도 한다. 그 상황을 탈출하는 데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노력과 인내가 아니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좋은 질문을 해야 좋은 답을 얻을 수 있다. 기존의 질문 ‘그 사람은 그것만 빼면 괜찮은가?’와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고칠 수 있을까?’는 틀렸다. ‘그의 단점이 객관적으로 문제 있는 수준임이 분명한가?’와 ‘단점이 개선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로 옮겨 가야 하는 것이다. 한 인간이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부터 가정한 후에, 그가 바뀌지 않더라도 내가 그를 감당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면, 일단은 적당한 거리를 둔 후 생각해도 늦지 않다.
이런 기도문이 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고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다 보면 할 수 있는 일도 놓치게 된다. 전문가의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우리의 감당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시간은 가치 있는 것에 쓰는 데만도 부족하고 나는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까.
원문: 정문정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