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파가 오가는 터미널을 혼자 지킨다. 자취계의 유니세프. 엄마가 오기 때문이다. 손목을 올려 시계를 본다. “아직 10분이 남았군.” 엄마가 도착하는 플랫폼은 2번이다. 하지만 나의 발걸음은 7번 플랫폼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터미널에서 유일하게 우유가 나오는 자판기가 있기 때문이다.
모닝 자판기 우유는 진리야
쌀쌀한 날씨를 녹이는 데는 동전 한 닢이면 충분하다. 나는 방에서 굴러다니던 500원짜리를 꺼내어 넣는다. 동전을 더 가져왔으면 우유와 블랙커피를 함께 뽑아 황금비율의 커피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자판기 우유로 만족해보기로 할까.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른다. “삐-” 드디어 나온다. 96도의 따뜻하고 고소한… 맹물, 맹물이 나오고 말았다.
이곳은 기사님들만 알고 있는 숨은 자판기 맛집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장이 났다니. 관리자에게 전화를 해보았지만 연락이 되지 않는다. 엄마가 도착할 때까지는 8분이 남았다. 근처 자판기에는 우유가 없는데 어떡하지?
이렇게 된 이상 편의점으로 간다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터미널 내의 편의점이다. 탱크 말고는 다 판다는 편의점. 그곳에는 자판기 우유는 아니겠지만 비슷한 맛의 음료가 있을 것이다.
편의점으로 향하며 생각을 정리해본다. 우유를 사서 데워마실까? 아니다. 우유를 아무리 데우고 소금이나 설탕을 뿌려도 자판기 우유의 맛은 나지 않는다. 오히려 프림을 사는 것이 자판기 우유(Vending milk)의 맛에 가깝다. 어릴 때 프림을 많이 퍼먹어 봐서 내가 잘 알지.
5분이 남았다. 프림을 살까? 하지만 버스에서 내린 엄마가 프림을 먹고 있는 아들을 발견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우리 아들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구나”라고 말한 뒤 버스를 환승해서 떠나는 엄마. 엄마! 갈 땐 가더라도 반찬은 주고 가야죠!… 결국 프림은 포기하기로 한다.
그런데 발견했다, 매일우유컵
아쉬운 대로 커피나 마실까 하다 익숙하지만 낯선 디자인을 발견했다. 매일우유가 왜 여기 있어? 바로 새로 나온 ‘매일우유컵’이다.
매일우유컵에는 혼합 분유가 13%, 탈지분유가 13%, 우유 향이 1% 들어가 있다는 안내가 붙어있다. 그래 분유! 분유라면 내가 원하는 자판기 우유 맛에 가까울지 모른다. 즉시 뒷면의 원재료명을 살펴봤다. 식물성 크림이 있다. 만세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자판기 우유다. 심지어 분유가 들어간 고급 자판기 우유!
그리움은 언제나 고소해
시간이 3분밖에 남지 않았다. 당장 구매. 한 컵에 1,000원이다. 자판기 우유보다 3배는 비싼 가격. 하지만 양이 4~5배는 되기 때문에 만족스럽다. 급히 뚜껑을 열어 가루를 붓는다. 뜨거운 물을 넣고 스틱을 휘휘 저으면 완성. 완성된 우유를 후후 불어 살짝 마셔본다. 고소한 우유 향과 함께 들어오는 달콤 느끼한 맛. 그리웠다 이 녀석.
매일우유컵을 마시다 말고 편의점을 나간다. 자판기 우유는 추운 날씨에서 마셔야 진리니까. 적당히 달콤하고, 적당히 짭짤하며, 적당히 느끼한 맛의 밸런스의 집합체. 감각을 잃어버릴 듯한 평화가 찾아온다.
엄마가 내렸다. 아침부터 우유 컵을 들고 있는 아들을 보자마자 한소리 한다. 어릴 때 잘 마셨으면 엄마가 고개를 더 올려 봤을 텐데. 나는 끝까지 이것이 자판기 우유라는 것을 비밀로 했다. 7번 플랫폼 자판기 우유는 떠나갔다. 하지만 나에게 새로운 자판기 우유가 생겼다. 심지어 판매도 세븐일레븐에서 한다고. 7과 나의 인연은 올해도 계속될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