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시작하는 포스트는 어디까지나 ‘스포츠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체적인 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를 일부 포함할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정유라는 정말 그렇게 말을 못 탔을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열리면서 ‘정유라(22·사진)가 과연 제대로 말을 탈 줄이나 아는 거냐’는 비판이 곳곳에서 들렸습니다. 먼저 정유라가 2014 인천 아시아경기 승마 마장마술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공헌도가 떨어졌다는 게 단골 비판 소재였습니다. 잠깐 2016년 10월에 나온 《한겨레》 기사 「승마선수 정유라의 국제대회 성적을 알려드립니다」를 볼까요?
당시 성적을 살펴보면, 한국의 금메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기수는 정유라 씨가 아니라 75점 만점에 74.342점을 받은 에이스 황영식 선수와 71.237점을 받은 김동선 선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 씨의 개인 성적은 참가자 32명 가운데 5위에 해당하는 69.658점입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32명 가운데 5위면 그렇게 못하는 건가요? 게다가 정유라가 당시 단체전에서 제일 낮은 점수를 기록한 한국 선수도 아닙니다. 김균섭(37)이 68.816점으로 한국 선수 네 명 가운데 4위였습니다.
마장마술 단체전은 나라별로 4명이 참가해 점수가 가장 나쁜 선수 한 명을 빼고 나머지 세 선수 평균 점수로 순위를 가립니다. 그래서 순위를 정할 때 세 명만 자르다 보니 정유라가 최하위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도 쉬운 일이라면 쉬운 일입니다.
정유라 세계랭킹은 얼마나 낮았을까
사람들이 또 자주 비판하는 것 중 하나가 세계랭킹. 정유라는 국제승마연맹(FEI) 마장마술 개인 랭킹이 829명 가운데 561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퀴즈. 그러면 한국 승마 역사상 정유라보다 FEI 랭킹이 높았던 선수는 몇 명일까요? 정답은 두 명입니다. 아래 표는 총 다섯 줄이지만 김동선(29)이 석 줄입니다.
최준상(40)은 2008 베이징 올림픽, 김동선은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자력 진출했던 한국 승마 간판입니다. 한국 승마 역사상 올림픽에 자력 진출했던 건 이 두 선수밖에 없습니다. 그다음이 정유라입니다(승마는 성별 구분 없이 참가합니다).
어떤 선수를 유망주라고 부를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유라처럼 세계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한국 선수 가운데 그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없을 때는 유망주라는 표현을 쓰면 안 될까요?
이번에는 삼성증권 테니스단 해체 소식을 전한 2015년 3월 17일 자 《동아일보》 기사 「삼성증권 테니스단 해체… 유망주 집중 후원하기로」를 보겠습니다.
주(원홍 당시 대한테니스협회) 회장은 “3년 후 성과가 좋으면 정현이나 협회 모두 계약을 3년 연장하기로 했다. 임용규와 홍성찬, 정윤성, 이덕희 등 유망주가 많은 만큼 체계적으로 키워 보겠다”고 말했다.
당시 기준으로 이덕희(20)는 랭킹 437위, 정윤성(20)은 1005위였고 홍성찬(21)은 아예 랭킹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테니스 유망주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기사에서 보신 것처럼 이들 역시 ‘삼성(증권)’을 통해 테니스 협회 후원을 받았습니다.
얼마를 후원하는 것부터 특혜일까
그래도 여전히 한 달에 1억 원이 넘는 돈을 지원받은 건 과했다는 비판이 따라다닐 수 있습니다. 동의합니다. 당시 남자 테니스 세계랭킹 122위였던 정현(22·현 58위)이 삼성증권에서 후원받은 금액이 연봉을 포함해 1년에 4억 원이었습니다. 확실히 정유라가 지원을 많이 받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승마는 원래 돈이 많이 드는 종목입니다. 김승연 한화 그룹 회장(사진 왼쪽) 3남인 김동선(오른쪽)은 리우 올림픽 때 대한승마협회 부주의로 말에게 먹일 건초를 구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자 “저처럼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선수라면 어떻게 대회를 치를 수 있을지 걱정될 수준”이라면서 “협회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협회의 관심과 지원’은 어디서 나올까요? 정답은 ‘기업’입니다. ‘회장사’라는 표현 들어보셨나요? 각 종목 협회(연맹)를 후원하는 회사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컨대 SK텔레콤에서 해마다 펜싱 그랑프리를 개최하는 건 대한펜싱협회 회장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회장사는 얼마나 쓸까요? 인천 아시아경기 당시 SK텔레콤 관계자는 “해마다 다르지만 연평균 20억 원 정도를 펜싱에 투자한다“고 말했습니다. 현대차그룹에서 30년간 양궁에 투자한 돈은 450억 원 정도(연간 15억 원)입니다. 펜싱 선수들이 경기 때 쓰는 블레이드(칼)나 도복·마스크, 양궁 선수들 활을 사는 돈도 다 여기서 나옵니다.
두 종목은 그래도 성적을 내지 않냐고요? 과연 요트 선수들이 한 대에 4,000만 원에 육박하는 배(470급)를 전부 자기 돈으로 살까요? 2인승 카누도 2,500만 원 정도 나갑니다. 두 종목 모두 아시아에서는 몰라도 전 세계적으로 한국이 강국이라고 하기 힘든 종목입니다. 그러면 이런 종목은 돈 있는 사람만 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각 종목 협회(연맹)는 회장 선거철만 되면 기업인 모시기에 바쁩니다.
거꾸로 회장 후보들 공약에서 빠지지 않는 문구가 ‘개인재산을 털어서라도…’인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만약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63)이 없었다면 한국은 2018 평창 겨울올림픽 때 가장 인기 종목인 아이스하키에 선수단을 내보내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예전에는 정치인, 그러니까 국회의원을 회장으로 선호했던 이유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실 겁니다.
한국 스포츠가 굴러가는 방식: 평창을 또 걱정하는 이유
전에 쓴 것처럼 한국 스포츠는 이렇게 굴러갑니다. 이게 이상적이라거나 최선이라는 이야기는 물론 절대 아닙니다. 다만 이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평창 올림픽이 더욱 걱정입니다. 평창 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국내 후원·기부액이 1조 원을 넘어섰다고 자랑했는데 무슨 소리냐고요? 한번 후원·기부 기업 명단을 볼까요?
강원 지역 기업과 (준)공기업이 너무 많이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 제 착각이겠죠? 조직위에서 보도자료에 “민간 기업에 대한 후원 유치를 대부분 완료했지만, 공공기관의 참여는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쓴 걸 ‘저 포도는 너무 시어’라고 읽은 것도 마찬가지겠죠?
같은 이유로 「[평창, 기업마케팅 반토막] “후원 잘못했다 뇌물로 엮일라” 입장권 구매도 망설인다」는 기사도 그냥 《아시아경제》가 경제지라서 나온 기사일 겁니다. 왜 이 기사에 등장한 삼성전자 관계자는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마케팅 부서에서 조금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다”고 설명해 제 우려가 맞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걸까요?
아니, 다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아도 겨울 올림픽 최고 스타인 ‘피겨 여왕’ 김연아(28)를 CF에서 보기 어렵다는 것부터 각 기업이 이번 올림픽을 맞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정작 김연아 카드를 활용한 건 사실 올림픽 콘텐츠를 마케팅에 쓸 권한이 없는 SK텔레콤이었습니다. 조직위는 이 광고를 앰부시(ambush) 마케팅이라고 보고 상영 중단을 요청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정유라가 아무 문제도 없었다고 주장하려는 건 절대 아닙니다. 다만 나비효과라고 해야 할까요? 정유라 사태가 한국 스포츠가 굴러가던 구조 자체를 뒤흔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창은 한국 스포츠에 과연 기존 방식이 적폐(積弊)였는지 아니면 차악(次惡)이었는지 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