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의 배경이 되었던 1987년 당시 (어차피 교수님도 수업을 안 하기에) 학업을 전폐하고 매일 명동과 종로에서 뛰어다녔던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대단한 것은 아니고 당시 대학생이면, 최소한의 문제의식이 있다면 누구나 돌을 던지거나 응원을 했습니다.
외대의 경우는 문제의식이 좀 과한 편이어서 84~87년 말까지 수업을 안 한 날이 더 많았군요. 4월 5월은 그냥 자율휴업 수준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시위하러 등교를 한 셈입니다.
‘1987’은 보는 내내 눈물을 흘릴 것 같아서 나중에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무척 한가할 때에 볼 생각입니다. 영화를 못 봐서 어디까지 재현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당시 자료가 있기 때문에 잘 재현했으리라 믿습니다. 고인의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설명은 영화에 맡기고, 그 이후의 사진을 몇 장 가져와 보겠습니다.
6월 항쟁 4개월 전의 사진입니다. 고인의 어머님과 누님이 시위에 합류하지 못하자 암자에서 종을 치며 한을 달래는 장면입니다.
6월 항쟁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입니다.
명동성당으로 들어간 시위대, 그들을 보호한 명동성당, 그들을 위해 물품을 전달한 시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대, 경희대, 외대 등의 동부지역 대학교는 연일 가두시위를 통해 그들을 응원했습니다.
경찰은 ‘농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전부 연행하겠다’는 방침을 명동성당에 통고했다. 그러고 나서 오후 2시경 다시 최루탄을 퍼부으며 맹공격을 해왔다. 성당에 왔다가 엉겁결에 갇히게 된 신자들과 시민들은 최루 가스로 범벅이 됐다.
도처에서 비명 소리가 나면서 아비규환의 생지옥 같았다. 경악을 금치 못한 명동성당 김병도 주임 신부는 ‘명동성당에서 이렇게 최루탄을 쏘는 것은 예수께 총부리를 대는 것이다. 만일 계속 최루탄을 쏜다면 전두환 정권이 가톨릭교회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강력히 경고했다.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신부를 농성 중이던 시위대가 축하를 해주는 모습입니다.
6월 항쟁 이전까지 우리는 무척 외로웠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셰퍼드같은 표정의 KBS 앵커가 ‘적군파’ 운운하던 장면을 잊지 못합니다. 관제언론만 접하던 대부분의 국민이 항쟁을 ‘대학생들의 배부른 타령’으로 여겼으니까요.
그런데 6월 항쟁은 정말 남녀노소가 없었습니다. 거리를 나서면 수많은 직장인 선배들이 몰려나와 응원을 해주었고, 전경에 쫓겨 남대문시장으로 들어서면 상인들이 우리를 숨겨주고 셔터를 내렸습니다. 심지어 할아버지들이 나서서 경찰버스에 연행된 학생들을 꺼내주기도 했습니다. 전경의 진압봉을 빼앗아 제게 자랑한 할아버님도 있었습니다.
하드를 배달하던 오토바이가 난입해서 ‘저건 또 뭐야?’ 하고 있는데 ‘자신은 이것밖에 못 한다’면서 (막대)하드를 마구 뿌린 경우도 있었습니다. 최루탄을 맞고 남산으로 밀려 올라갔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호스를 문밖으로 빼내서 제 얼굴을 씻겨주고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서 먹여준 적도 있었지요.
우리의 숫자가 워낙 많으니 전경의 기세도 이전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무장해제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6월 항쟁은 비폭력평화시위였기에 더욱 위대합니다. 물론 시간이 흘러 외곽에서 진압이 들어올 때면 UFC 한판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우리가 먼저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습니다.
시위대에 밀려 분수대에 빠진 전경들을 시위대가 꺼내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이던 철거민의 아이입니다. 지금은 40대가 되었겠군요.
티셔츠 문구에 눈이 갑니다. 몇십년이 흐른 지금도 거짓이 판치는 나라라…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