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Psychology) 하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들의 분석 수준(unit of analysis)이 매우 낮고도 낮은 곳을 지향한다는 점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심리학자들의 관심사는 ‘개인’이며, 집단이 아닌 개인의 생각과 행동 근거를 파헤치려는 관점은 현대에 정립된 심리학을 지탱하는 근간이라 할 만하다.
그런 이유로 사회의 거시적 흐름과 패턴, 제도와 조직, 관료제 조직의 역동 등을 다루는 심리학 분야들은 대개 응용심리학 범주에 들어간다. 이들은 개인 연구를 우선시하는 기초심리학을 토대로 쌓아 올려졌으면서도, 더 이상 심리학도 사회적인 측면에 무심할 수 없다는 심리학자들의 문제의식이 빚어낸 최신의 성과다.
심리학은 사회적으로도 유용한가?
집단, 공동체, 사회 등의 범주를 품으려는 심리학자들의 노력은 여전히 충분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심리학의 가치를 개인의 영역으로 한정한다. 특히 소비시장에 유통되는 심리학 콘텐츠 대부분은 힐링이라는 딱지를 달고 있으며 결국 인생에서 경험하는 온갖 크고 작은 문제의 근원은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하지만 인간이 있는 곳에는 곧 심리학이 있다고 했던가. 심리학의 가능성은 개인 영역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산업, IT 등 다양한 분야와 접목된 새로운 심리학 분야가 도처에 가득하다. 단지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언급했듯 심리학의 출발점은 개인이었고 지금도 그 근본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인만을 보아서는 개인 대 개인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독특하고 심오한 개인과 개인들이 얽히고 얽혀 만들어내는 사회라는 놈이야 오죽할까.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사회심리학, 정치심리학, 문화심리학을 만들었다. 하지만 심리학은 여전히 개인 영역에서만 소비된다. 사회를 논하고자 하는 심리학, 그러나 여전히 개인에만 몰두하는 우리들. 그 간극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가?
심리학자들은 우선 떼를 쓰고 징징댈 수 있다(그럴 자격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택 가능한 행동 범주 내에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다). 우리들은 이것저것 열심히 해왔는데. 사회도 말하고 정치도 말하고 경제도 말하고 문화도 말하고 4차 산업혁명도 말해왔는데 왜 그걸 알아주지 않을까? 심리학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깊은 잠재력을 가졌음에도 왜 ‘심리학=힐링’이라고만 생각할까? 왜 심리학의 사회적 유용성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는 걸까?
하지만 떼를 쓰고 징징대기 이전에 한 번 생각해봄 직한 문제가 있다. 심리학의 대중적 이미지를 일방향적인 방향으로 흐르도록 만든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 심리학은 분명 사회를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심리학이 사회를 충분히 말하고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떨까? 이번에도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있을까?
입시 문제, 주거 문제, 환경오염 문제, 불평등 문제, 실업 문제, 정치 문제 등 이러한 사회 문제에 심리학자들은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 심리학자 저마다의 고유한 생각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 찬성하는 사람, 현안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 정치적인 기호에 따라 관점을 오른쪽으로 틀어서 보는 사람, 왼쪽으로 틀어서 보는 사람. 그러나 심리학자 개인이 아닌 심리학자 집단으로서 각종 한국의 사회 문제에 입장 표명을 해야 한다면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1936년,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낀 일군의 미국 심리학자들은 사회문제 심리학회(Society for the Psychological Study of Social Issues)를 새로이 창립하였다. 그리고 해당 학회는 1945년 미국심리학회 정식 분과(division)로 등록되었다(2017년 현재 미국심리학회는 약 56개의 분과를 마련했으며 사회문제 심리학회는 이 중 아홉 번째로 등록된 분과다).
한국 심리학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6년 전인 1991년, 한국심리학회의 사회문제 분과가 창립되어 부정부패, 국민의식, 통일, 가족 및 고령화, 자살 등 여러 사회 문제들과 관계된 학술대회들을 지속적으로 개최해 왔다.
개인 영역에의 집중이 심리학만의 독특한 정체성과 학문적 경쟁력을 구축하는 데 큰 발판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사회적 단위에 발맞춰 살아가는 존재인바, 사회 영역에 대한 관심은 시기의 문제였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심리학자들이 직면해야 했을 거대한 과제였다.
그렇게 심리학계에는 사회문제 분과가 새롭게 모습을 드러냈고 그로부터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심리학자들은 그동안 얼마나 충분히 사회 문제에 골몰해 왔을까? 이제 드디어 심리학자 집단으로서 사회 문제에 입장 표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연구 성과는 충분히 무르익은 상태가 되었는가?
국내 심리학자 정안숙, 어유경, 한규석은 최근 「국내의 사회문제에 대한 심리학 연구의 경향: 《한국심리학회지: 문화 및 사회문제(1994-2015)》 게재 논문에 대한 분석」(2017)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사회문제에 관한 국내 심리학자들이 보여주었던 그간의 대응들을 객관적으로 조망해보자는 취지였으리라. 연구자들은 1994년부터 2015년에 이르기까지 약 22년간 게재 논문의 특성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들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볼 만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총 464편의 논문 중 실증적 연구 337편의 연구 내용 대부분은 개인 수준의 변인을 다뤘으며 공동체·사회 수준의 변인을 다룬 연구의 비중은 전체 가운데 약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회문제를 다루자고 만들어진 저널임이 무색해질 정도다. 최근 들어 공동체, 사회 수준의 변인을 다룬 연구들의 비율이 약간이라도 증가하는 추세라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일까.
시도는 좋았으나 아직 가야 할 길 창창하리라
물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 바로 개인 범주의 연구라 해서 그것이 언제나 그 수준에 머무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때로 대중적인 유명세를 타는 심리학 이론 및 용어가 있다.
가령 자존감(Self-esteem)의 경우 태생이 개인 수준 변인임에도 어느새 우리 사회 내 자존감 열풍으로까지 번지고 사회적인 담론으로까지 성장할 줄은 누가 알았으랴. 혹은 발달심리학 분야에서 스탠퍼드 마시멜로 실험으로 잘 알려진 만족 지연(delayed gratification)과 미래 학업성취 간 관련성에 대한 논문 한 편이 그토록 강력한 사회 정치적 파문을 불러올 줄은 또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사회 문제만을 위한 심리학자들의 의식적 노력은 꼭 필요하다. 얻어걸리는 상황만 바랄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심리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주장을 펼 수 있어야 한다. 대중이 몰라준다며 떼만 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를 논할 때는 왜 꼭 심리학을 같이 곁들여야 하는지 보여줄 필요가 있다.
사회문제 심리학회를 만든 선구자들은 단지 심리학의 외연 확장만을 바라며 그 같은 결단을 내린 것이 아니다. ‘심리학이 심리학자들 사이의 전유물로만 그치지 않고 현대 한국 사회의 “사회문제”에 대해 과학 학문으로서 기여할 수 있는 지점’(정안숙, 어유경, 한규석, 2017)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간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 온 심리학이 사회에 보답할 하나의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