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무대에 처음 선 게 81살이었지요. 젊었을 때 의상에 관심이 많았어요. 무대에 서려니까 노력을 많이 하게 돼요. 체력이 떨어질세라 영양제도 챙겨 먹고 운동도 하지요. 100살 모델에 도전해 보라는데 건강만 허락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요.”
햐얀 머리에 정장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무대를 사뿐사뿐 걷습니다. 굽 있는 구두를 신었지만 허리를 곧게 편 자세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무대를 장악합니다. 그의 나이 91살. 10년 넘게 시니어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박양자 씨입니다.
“그분은 스타예요. 방송국에서 서로 취재하려고 합니다. 젊은 사람과 소통도 잘하셔요. 임플란트도 하고 백내장 수술도 하시고 꾸준히 관리하세요. 그분을 보며 나이가 들어가면 저렇게 늙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존경스럽습니다.”
패션모델, 배우, 광고 모델 분야 진출
박양자 씨의 인생 2막을 화려하게 부활시킨 사람은 뉴시니어라이프 모델교실 구하주 대표입니다. 구 대표는 지난 10년간 2,000여 명이 넘는 시니어 모델을 교육했고 이 가운데 현재 120명이 크고 작은 무대에 서며 다양한 활동을 펴고 있습니다.
뉴시니어라이프는 시니어들에게 꿈과 젊음을 전파하는 패션이벤트 사회적 기업입니다. 시니어 모델교실, 패션쇼, 궁중의상 체험 관광, 시니어 이벤트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지요.
“1년에 한 20회 정도 패션쇼를 합니다. 박람회 등 공공행사나 기업의 판촉행사 무대에도 서고 보청기, 화장품 등 시니어 용품 광고 모델이나 홈쇼핑에 의류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지요. 최근에는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의뢰를 받아 특정한 상황을 묘사하는 재연 배우로 몇 분이 나섰습니다.”
91세 모델이 퍼트린 행복 바이러스
73세 이복순 씨는 텔레비전에 출연한 박양자 씨를 보고 수소문 끝에 7개월 전 뉴시니어라이프 모델 교실을 찾아왔습니다. 이 씨는 아침 6시에 일어나 충남 당진의 집을 출발해 버스와 택시 3-4번을 갈아타고 서울로 올라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왕복 4시간이 넘게 걸리지만 결석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지팡이 없이는 10m도 제대로 걷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모델교실 졸업생을 위한 패션쇼에 당당히 무대에 올랐습니다.
“디스크에 무릎관절 수술에 성한 구석이 없어요. 그동안 내한 몸 희생해서 10명, 100명이 좋다 하면 ‘그까짓 것 못하랴’라고 살아왔지요. 그런데 내 몸이 너무 아프고 걸핏하면 입원하니까 우울했어요.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90살 모델 이야기를 보고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마음먹었지요.”
이복순 씨는 워킹 연습을 하면서 자신의 몸이 서서히 달라지는 걸 보니 힘들어도 자꾸 오게 된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마음이 밝아지고 자신감도 넘쳐 보인다고 해요. 시간이 거꾸로 간다고도 하고요. 멀고 힘들지만 내가 좋아서 댕기는 거라 상관없어요.”
이 씨는 요즘 대입 검정고시에 도전합니다. 자신감이 또 다른 꿈을 이뤄낼 용기를 준 것이지요. 구 대표는 이 씨를 보면서 “인간 승리는 어느 곳에서나 자기가 만들어가는 것이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습니다.
사람 패션쇼
구하주 대표는 30년 넘게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고객들이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체형이 바뀌는 걸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봤습니다. 실버산업을 공부하며 노화에 대해 알게 됐고 노인들이 아름답게 늙어가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지요.
“그동안 실버산업은 아픈 사람들을 위해 부족함을 채워주는 방식이었지요. 하지만 병이 난 다음에 치유하려면 어렵기도 하고 막대한 비용이 듭니다. 예방이 중요한 거죠.”
구 대표는 디자이너로 첫 패션쇼를 열 때 가슴 설레던 특별한 감동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에게 패션쇼를 시켜드리면 새로운 인생을 기대하리라 믿고 프로그램을 개발했습니다.
“처음엔 단순히 한을 풀어 주는 노인성 질환 예방 프로그램이었어요. 누군가는 영화배우, 슈퍼모델, 미스코리아 등을 꿈꾸잖아요. 그 꿈을 펼치지 못해 한이 맺히면 치매나 우울증, 불면증의 원인이 된다고 하더군요. 그걸 풀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사람 패션쇼를 시작했습니다.”
구 대표가 생각하는 모델의 기준은 특별했습니다. 첫 모델 콘테스트 때 30명 모집에 280명이 모였는데 이른바 ‘키 크고 잘생기고 반듯한 사람’은 뽑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딘가에 한이 있는 사람. 손을 만져보면 뭔가 애절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 위주로 뽑았습니다. 주변에선 왜 그런 사람을 뽑느냐고 했지요. 우리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조금 봐주면 다듬어주면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분에게 기회를 주는 거죠.”
구 대표는 “한이 풀리고 나니 이젠 후반기 인생을 더 의미 있게 살고 싶다며 일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욕구로 발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고령자 친화 기업 설립… 일자리 확대 기반 마련
뉴시니어라이프는 지난 11년간 국내는 물론 독일, 네덜란드, 중국, 일본, 미국 등 해외에서 151회 패션쇼를 공연했습니다. 2015년에는 한국관광공사로부터 ‘예비창조관광기업’에 선정돼 조선왕조 궁중의상 쇼, 궁중의상 체험 공연을 진행했습니다.
뉴시니어라이프 모델 교실은 현재 서울 강남구와 성북구, 서초구, 구로구, 분당구, 전북 익산시 등 6곳에서 열립니다. 익산시의 경우 서울에서 모델 교실을 수료한 회원이 자신의 터전인 익산에 모델 교실을 열어 열심히 운영하고 있습니다.
“회원은 전국구입니다. 이들이 각 지역에서 센터장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갖춰나갈 계획입니다. 현재 대전과 부산, 진주, 대구 지역에 지부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습니다.”
특히 뉴시니어라이프는 올해 보건복지부가 지원하는 고령자 친화 기업 설립 프로그램에 컨소시엄으로 참여하게 돼 내년부터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일자리가 더 많이 생겨날 것으로 기대를 모읍니다.
실버타운 건설이 목표, 50세부터 무덤까지
구 대표의 꿈은 배우고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실버타운 건설입니다.
“100세가 귀하고 아름답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귀한 시니어들을 많이 배출해서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까지 행복하고 멋지게 살다 가고 싶어요. 제일 안타까운 건 나이 들면서 어른들이 존경받지 못하는 겁니다. 이를 타파하고 싶어요. 노인이 어딜 가든 제일 앞자리에 설 수 있는 자격을 갖춰드리고 싶어요.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아니지만 50살에서 무덤까지 특별한 파라다이스를 만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