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화성침공 속보의 추억
1938년 10월 30일, 미국 CBS라디오에서는 “화성인이 지구를 침공했다”는 ‘속보’가 전해졌다.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들은 시민들은 겁에 질린 채 거리로 뛰쳐나왔고, 뉴저지 일대는 순식간에 교통이 마비되고 폭동이 일어나 대혼란에 빠졌다.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민들을 놀래켰던 외계인침공 소식은 사실 H. G. 웰스의 소설 ‘우주전쟁’을 바탕으로 만든 오손 웰스의 라디오드라마였기 때문이다. 단체로 드라마에 낚인 시민들은 멋쩍은 표정으로 집으로 향해야 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일이 벌어졌다. 어제 오후 6시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은 국회 정보위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김정은은 총공격 명령 대기 지시를 했는데, 총공격의 명령이 떨어지면 속도전으로 일체가 되어 강력한 집단적 힘을 통해 각 동지들이 자기초소에 놓여있는 무궁무진한 창조적 발상으로 서로를 위해 해야한다는 지시다”
이소식을 전해들은 언론들은 앞다투어 ‘김정은의 총공격 명령’을 속보로 타전했다. 연합뉴스의 최초 보도를 시작으로 수백개의 언론이 같은 내용의 속보를 전하자 이소식은 SNS를 타고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약 40분 뒤 정청래 의원이 급하게 정정브리핑을 가졌다. 정 의원은 조 의원이 언급한 ‘총공격 대기 명령’은 김정은의 발언이 아닌 이석기 의원의 발언이었다고 정정했다. 조 의원이 국정원 측이 재생한 이석기 의원의 RO모임 강연을 듣고 김정은의 말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언론들이 황급히 정정보도를 냈지만 ‘총공격 명령설’은 이미 퍼질대로 퍼진 뒤였다.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던 북한 관련 속보
시민들이 단체로 ‘거짓’ 속보에 낚였다는 점에서 어제의 해프닝은 38년 뉴저지에서 일어났던 일화와 유사하다. 휴전선 넘어 200만 대군과 인접해 있는 남한 국민들에게 북한의 총공격 소식은 외계인침공 소식에 비견될 만한 치명적인 위협이다.
하지만 한국의 시민들은 뉴저지의 시민들처럼 거리에 쏟아져 나오거나 피난을 준비하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은 위협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했던 뉴저지 시민들과 언론의 실제 ‘총공격’보도에도 태연했던 한국 시민들, 단지 사실 같았던 드라마와 거짓말 같았던 언론보도 때문이었을까? 여기에 대한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만성화된 북한의 위협
2. 언론의 (북한관련)과장·허위보도에 익숙해진 국민들
3. 1번을 과장해 이용하는 정치세력
4. 실제로 낮아진 전쟁가능성
이중 1번은 상수이고 4번은 논쟁적인 문제라 치면, 지적할 수 있는 원인으로 2번과 3번이 남는다. 어제의 소동은 순전히 2번과 3번이 만나 벌어진 희극이었다. 발화자 조원진 의원은 사실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주어를 잘못 이해했고, 언론들은 저 망말을 확인없이 그대로 인용한 채 속보경쟁에 뛰어들었다. 그야말로 ‘각본없는 드라마’가 전파를 탄 것이다. 1938년의 뉴저지가 그랬던 것처럼, 어제 정청래 의원의 정정보도가 나가기까지 약 한시간 동안 한반도는 언론이 만들어낸 가상의 전쟁상태였다.
한국 국민들이 늘 어제처럼 초연했던 것은 아니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때, ‘서울불바다’ 발언이 나왔을때는 남한에서도 1938년 뉴저지의 상황과 흡사한 장면이 연출됐다. 공포에 질린 시민들은 라면과 식료품을 사재기했고 시중에 방독면이 품절됐으며, 상당수 가정들이 실제로 피난을 준비했다. 당시의 모든 언론들은 하루종일 특집뉴스로 북한의 동향을 전했다.
세상이 달라졌다. 이제 사재기 같은 건 없다. 방독면을 못구해 안달난 사람도 없으며, 주식시장도 전방 지역의 땅값도 그대로다. 앵커가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십시오”라는 고루한 멘트를 날리지 않아도 국민들은 알아서 생업에 매진한다.
‘안보불감증’은 국민을 우습게 보는 시각
이번 해프닝은 북한의 군사위협에 대한 남한 국민들의 촉각이 무뎌졌음을 보여준다. 우리 대통령이 북측 지도자와 만나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 벌써 두 차례나 생중계 됐고, 우리 기업들이 개성에서 공장을 돌린지 10년이 넘었다. 우발적인 남북 긴장상황은 충분히 학습돼 있다. 이제 국민들은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어제의 태연함을 ‘안보불감증’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유다.
국가 간 전쟁 연습, 군사적 긴장 고조의 목적은 전쟁이 아니라 내부 통치전략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 모르는 국민은 없다. 전쟁 불감증이 당연한 이유는 두 가지다. 승부도 출구도 없는 공멸의 현대전, 그리고 당장 일상의 삶이 ‘더’ 다급하기 때문이다. (정희진 ‘불감증의 위계’)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여전히 남한사회의 주류 정치세력은 북한의 위협을 필요로 하는 냉전주의자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북한발 군사위협은 늘 막대한 정치적 이득을 안겨주는 지니의 램프였다. 그들이 냉전주의의 끝자락을 붙잡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제 조원진 의원의 ‘착각’도 그런 심정의 발로였을지 모른다. 나는 ‘김정은이 총공격 대기 명령을 내렸다’는 그의 발언이 착각이 아닌 ‘바람’에 가까워 보인다.
냉전주의가 대내적으로 발현되는 것이 매카시즘이다. 냉전주의-매카시즘의 작동조건은 국민의 ‘불안’이다. 이것들은 국민의 불안이 끝나는 순간 힘을 잃는다. 이제 우리 국민들은 이제 김정일이 죽어도, 개성공단이 문을 닫아도, 연평도에 포탄이 떨어져도, 심지어 김정은의 총공격명령 소식에도 공포에 떨지 않는다. 일련의 사건들을 대하는 사회일반의 담담함은 한국사회에서 냉전주의-매카시즘의 시효가 끝나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어제 보여준 국민들의 시크함이 유쾌했던 이유다.
이제 남한사회에 전해지는 북한발 군사위협 소식은 오손 웰스의 라디오드라마와 같다. 뉴저지 시민들은 드라마에 제대로 한번 속고 난 뒤 실제와 허구를 구별하는 법을 배웠다. 하물며 ‘비슷한 드라마’에 수십 수백번씩 속아왔던 한국의 국민들이 그런 레파토리에 계속 속을 리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