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연말을 혼자 보냈던 것은 어쩌면 지금을 위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마치 잘 숙성된 포도주처럼. 나란 남자는 당신과 한 잔을 기울일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그 음료가 소주, 맥주가 아닌 와인이라고 믿고 있다. 내 머릿속엔 연말, 와인, 로맨틱, 성공적.
당당하게 도착한 마트. 하지만 마트에서 와인코너는 던전 오브 던전 같은 곳이다. 정장을 장착한 직원의 “찾으시는 와인 있으세요?”라는 한 마디에 우리의 정신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찾으러 온 것이지? 와인 이름도 모르는 나 따위가 와인을 마실 자격은 없어!
하지만 걱정 마시라. 오늘 준비한 ‘마트 와인 고르기 시뮬레이션 게임’과 함께라면 성공률이 높고 저렴한 와인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오는 연말, 콜라 고르듯 자연스럽게 와인을 선택해보자!
1. 퀘스트: 저희 매장에 그런 와인은 없는데요?
앞서 말했듯 와인매장의 가장 큰 문턱은 ‘판매직원’이다. 무슨 와인을 찾냐고 물어보기에 머리를 쥐어짜서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 본 와인 이름을 말했더니 “없다”는 말만 돌아온다. 자존감의 하락. 정말 유명한 건데 왜 없지요? (당연하지 비싸고 희귀한 거니까)
차라리 정확한 와인 명칭보다는 맛이나 종류 등 추상적인 덩어리로 시작하는 게 좋다. 그 순간 와인매장 직원은 우리의 멘탈을 공격하는 몹에서 아이템을 찾아주는 NPC로 변한다. 사실 그분들은 마트에 소속된 직원이 아닌 와인 회사 직원이기에 당신에게 와인을 쥐여주고 싶어 하는 자들이다. 그러니 단 거 주세요.
2. 속성: 포도면 포도지 레드는 뭐고 화이트는 뭐야?
달콤한 와인은 참 많다. 하지만 와인의 종류를 고른다면 선택의 폭을 줄일 수 있다. 색상별로는 화이트와인과 레드와인, 그리고 분홍빛이 감도는 로제와인이 있다. 기호에 따라 탄산이 들어간 스파클링 와인을 고르는 것도 재미있겠다. 무엇을 골라도 좋다. 어차피 우리 와인 초보에게는 신세계니까.
연인을 위해 특별한 와인을 보여주고 싶다면 로제와인 쪽을 노려봄이 어떨까? 적당히 달달하고 가볍다. 무엇보다 분홍빛의 색깔이 너무 매혹적이다.
3. 현질: 비싼 와인이 더 맛있냐? 네 사실입니다
어쩌면 두 번째 위기. 자본주의적 딜레마다. ‘내 사랑을 전달할 와인에 돈을 얼마나 쓸 것인가?’ 1만 원도 되지 않는 데일리 와인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괜찮아 보이는 녀석들은 왜 0이 하나 더 붙어있는 건지… 무엇보다 적당한 맛의 와인의 가격대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감히 개인적인 평을 하자면 마트 와인 중 3만 원 이상은 무엇을 골라도 맛있었다. 하지만 초보의 입장, 그리고 졸부가 아닌 입장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1만 5,000원 내외의 와인이 처음 접하기에 종류도 다양하고 도전하는 재미도 있다. 직원에게 1만 5,000원대 와인을 물어보되 욕심이 생기면 예산을 늘리기로 하자.
가끔 몇몇 사람이 말한다. 비싼 와인과 싼 와인의 차이가 없다고. 물론 사실 아니다. 하지만 가격대가 어느 수준 이상 올라가면 차이가 크게 나진 않는다. 고수들은 미세한 차이를 즐기는 법이지만 최고의 와인이 아니라서 천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우린 그냥 우리 입맛에 잘 맞는 와인을 많이 즐기는 것이 더욱 좋다.
4. 맵 설정: 같은 값이면 비유럽으로!
거의 다 왔다. 이번에는 산지다. ‘와인은 포도 빨, 포도는 토양 빨’이라는 말이 있듯이(없다) 어느 지역의 와인을 고르는가에 따라서 퀄리티가 다르다. 집 앞에 길도 잃어버리는 처지에 지역명까지 외우는 것은 무리고, 초보라면 나라 정도로 와인을 구분해도 나쁘지 않다.
와인은 당연히 프랑스 아니면 이태리지! 라고 고르는 분들은 유명세 스튜핏!을 드린다. 같은 가격이면 유럽이 아닌 곳이 가성비가 좋다. 역사와 전통 유명세 프리미엄이 없기 때문이다. 와인 초보라면 신세계라 구분되는 칠레나 미국, 호주 등의 와인을 공략하자.
5. 결정: 최종 결정! 제 와인은요…
스무 고개하듯 와인을 추천받았다. 와인 초보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마셔보지도 못한 거. 주는 대로 받아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하지만 보통 와인도 아니고 연인과 함께할 와인이기에 마지막 정신줄을 잡아본다.
“그래서 이 와인 이름이 뭐라고 했죠? 아 그거! 네 물론 처음 들어봐요.”
우리는 검색의 민족이 아닌가. 비비노(Vivino)를 비롯한 와인 애플리케이션으로 라벨사진을 찍으면 해당 와인의 별점이나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이 또한 번거로운 일. 독해도 어플도 싫다면 관상을(?) 보자. 라벨에는 여러 정보가 있지만 생산자명. 와인명. 빈티지(연도)만 적혀있어도 마트 와인에서 보통은 하겠거니 판단할 수 있다.
좋아 너로 정했다! 드디어 마트 와인코너를 클리어했다. 뿌듯함에 신나서 집에 가기 전에 오프너와 잔은 집에 있는지 돌이켜보자. 나는 오프너가 없다는 사실을 중요한 순간에 알아서 로맨틱보다 차력 쇼를 한 적이 있다(…)
6. 엔딩: 마트 와인을 맥주처럼 마시는 그날까지
와인은 어려운 술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정작 해외에서는 페트병에도 자유롭게 마시는 것이 와인이건만. 우리는 격식을 갖춰야 하고 어느 정도 내면의 레벨이 오르지 않으면 와인을 마주하기를 꺼린다. 예쁜 와인잔이 없으면 어떻고, 멋진 요리가 없어도 뭐 어떤가? 치킨에도 맛있는 게 와인인데. 맛있으면 최고 아닌가?
마트에서 판매하는 와인은 이런 ‘와인의 막연한 고급 이미지’를 지워줄 수 있다. 잘 찾아보면 가격대도 낮고 맛있는 와인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첫발이 어렵지 자주 찾다 보면 생활에 스며든다. 와인 문화란 이렇게 발전해야 하는 것 같다. 쪼랩… 아니 와인 초보여, 용기를 갖고 마트에 가자.
연말 와인 공략은 드디어 엔딩을 맞았다. 그녀가 좋아할 멋진 로제와인을 골랐으니. 이제 남은 것은 와인을 함께 마실 그녀를 찾는 일이다. 하하. 생각해보니까 순서를 잘못 알았네… 잔이라도 하나 덜 살걸. 하하.
원문: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