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예부 기자다. 지나가는 초딩들도 “기자야, 돈 버는 게 힘들지?”라고 인생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는 그 일을 한다.
얼마 전에 직업 체험 중인 중학생들에게 나의 밥벌이에 대해 짧게나마 강의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앞날이 구만리 같은 아이들에게 연예기자에 대해 설명하려니, 뭐 그런 걸 다 되라고 하느냐는 듯한 표정이라 낯이 좀 뜨거웠다. 원론적인 것부터 짚고 넘어가기 위해 “연예기사의 종류에는 어떤 게 있을까요?”라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스캔들이요”라고 빛의 속도로 답했다.
누구를 탓하랴. 평범한 주부인 내 친구가 나보다 먼저 연예 찌라시를 구해 카톡으로 보내주는 세상이다. 찌라시가 돌고 돌아 같은 내용을 각기 다른 사람들로부터 하루에 여러 번 받은 적도 부지기수다. 요즘 대세 A양은 B군과 C군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고, 순수한 미소가 매력 포인트인 D군은 룸살롱 마니아며, 같은 그룹 멤버 E양과 F양이 물어뜯고 싸웠다는 이야기들은 심심할 때 읽는 유머 정도로 소비되곤 한다.
출처를 알 수 있든 없든, 일단 퍼지고 나면 찌라시는 사람들 사이에서 ‘걔는 그렇고 그렇대’라며 기정사실화 된다. 그야말로 모든 시민은 연예기자다.
이에 부응하듯, 연예인이 자주 출몰하는 곳에 잠복해 있다가 A양과 B군이 함께 있는 모습을 몰래 찍어놓고 ‘해명하라’는 언론은 흥신소를 자처한다. 그러니까 발로 뛰는 취재로 추구하는 ‘정론직찍’라고 해야 하나. 이제는 파파라치도 언론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것인지 ‘알았지만 찍지 않았다’는 식의 훈훈한 에필로그 기사를 통해 넓은 아량을 베풀기도 한다. 몰카까지 찍어가며 사랑 맺어주기에 여념이 없는 기사들을 보고 있으면 가끔은 내가 밥 벌어 먹는 이 바닥이 연예부인지 연애부인지 헷갈린다.
하지만 뭐 어쩌나. 연예와 연애는 대중의 공통 관심사고, 그러니 연예인이 연애하는 것에는 사람들이 더 사족을 못 쓰는 걸.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있다.
이렇게 저렇게 소비되는 연예 바닥…좋은 기사란 무엇인가
연예뉴스는 생각보다 폭이 넓다. 연예인이 활동하는 곳이 TV다 보니 방송, 미디어까지 영역이 넓어지고, 영화판으로 가면 심지어 전 세계로 판이 커지며, 연극과 뮤지컬 등 무대 위로 올라갈 때도 있다. 연예인이 사건사고에 연루되면 사회부 기사가 되고, 군대 문제가 얽히면 이걸 국방부 출입기자가 마크해야 하는지 우리가 해야 하는지 애매해진다. 그뿐인가. 요즘엔 유명인이 되면 다 연예인으로 취급(?)되니까 취재해야 할 대상의 경계가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
바꿔 생각하면 나올 기사거리가 넘쳐난다는 뜻이다. 한때는 연애뉴스 같은 연예뉴스에 대한 반발심에,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이것저것 건드려 보기도 했다. 아이돌이랑 봉사활동도 가보고, 이효리 언니 따라서 채식도 해보고, 드라마 촬영 현장에 궁녀로 잠입해 보조출연자 노동 실태를 살펴보기도 했다. 5년 내내 남의 작품만 보고 평가하던 영화 담당 선배는 직접 단편영화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연재하기도 했다. 다른 기사는 많다.
근데 그러면 뭐하나. 요즘 대세 클라라가 레깅스 입고 나오면 그날 이슈는 이거 하나로 끝나는 걸. 아마 클라라가 레깅스 입고 열애설까지 나 준다면 이틀은 먹고 살 수 있는 기사가 나올 거다.
실시간 검색어만큼 조회수가 보장되는 기사가 없고, 소녀시대가 공항에 걸치고 나온 티셔츠 한 장까지 아주 사소한 일거수일투족이 뉴스가 되는 이 연예계. 어떤 분야보다 검색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언론이 쓰면 대중은 읽고, 포털이 인기 검색어를 만들면 다시 언론이 쓴다. 그러니까 이런 순환구조 안에서 포털이 보우하사 밥 먹고 살고 있는 나는, 언젠가부터 좋은 기사라는 게 조회 수 많이 올릴 수 있는 기사인지 아니면 애초 내가 연예기자가 되기로 다짐한 이유처럼 재미와 의미를 추구하는 기사인 건지 아리송해졌다.
이렇다 보니, 나 역시 연예인을 이슈 그 자체로 여기게 됐다. 연예인이 주말에 자살하면 어제 죽지 왜 쉬는 날 죽었냐고 한탄한다는 기자들의 일화에 기함을 했던 내가, 이제는 기사 제목에 ‘사망’이라고 해야 할지 ‘숨져’로 해야 할지, 심지어 ‘자살’이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단어 하나에 천 단위, 만 단위의 조회 수가 왔다갔다하는데 사람이 보일 리 없다.
언론과 찌라시의 경계: 나도 좋은 연예기사를 쓰고 싶지만…
찌라시로 이런 저런 소문이 도는 것도 모자라, 가끔은 사생활까지 아낌없이 대중들에게 공개하고 해명해야 하는 그들의 의무는 누가 지운 것일까. 어떤 이들은 그게 대중이 주는 사랑에 대한 대가라고 말한다. 심지어 연예인이 공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백번 양보해 그렇다 쳐도, 대체 연애사까지 세상에 공개해야 하는 공인이 어디에 있나. 게다가 요즘처럼 모든 것이 이석기로 통하는 블랙홀 사건이 이슈를 장악할 때 열애설이 터지면 물타기라는 음모론까지 뒤집어써야 한다. 대개 공공의 이익과 관련이 없는 연예 뉴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이목을 끄는 광대의 몸짓, 딱 그 정도인 게 아닐까.
그렇게 사생활을 지킬 권리조차 보장해주지 않고 천박하게 대하다가도, 세상은 필요할 때면 연예인의 유명세를 마음껏 이용하기도 한다. SNS로 연예인의 워딩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 그저 딴따라인 줄만 알았던 애가 의외로 사회적인 발언을 하면 소셜테이너라는 고매한 이름을 붙여주고 개념 연예인으로 한 단계 상승시켜준다. 가끔은 이게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하는데, 이때 위험한 건 내편/네편 논리다. 조금이라도 이쪽의 정서와 다른 행보를 보이기라도 하면 ‘우리 편인 것 같았는데 아니네’하고 정색하는 건 낙인과 다를 바 없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진보매체의 연예기자로 일한다는 건 종종 황당한 프레임을 느끼게 한다. 이를 테면, “나도 너희 편인데 왜 우리 프로를 까냐”, “나도 대학생 때 나름 운동권이었으니 우리 스타 좀 잘 봐달라”는 데덴찌 같은 소리를 들을 때는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혼란스럽다.)
언론과 찌라시의 경계에서 각자의 이익과 욕구에 따라 소비되는 연예인과 뉴스를 보면, 결국은 어떻게 좋은 기사를 공급할 것인가 하는 고민으로 되돌아온다. 결론적으로는 나도 좋은 기사를 쓰고 싶다.
하지만 ‘스캔들처럼 천박하지 않으면서 재미와 의미를 담고 있지만, 너무 착하지만은 않고 적당히 섹시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조회 수까지 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좋은 기사는 박진영의 ‘대충 부르지만 진심을 담으면서도 얼굴은 찡그리지 않고 노래하는 내내 들숨 날숨을 내쉬어 소리반 공기반인 톤을 유지하라’는 조언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일 하루 벌어먹을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는 처지에, 새벽 3시를 향해 가는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실시간 검색어로 연예인의 사사건건이 탐닉되고 소비되는 세상에 과연 좋은 연예기사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 글은 블로그 난지도 파소도블레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