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경극 도제들이 고수들의 공연을 보면서 감탄하던 중 한 아이가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다. 다른 아이가 묻는다 “왜 울어? 그렇게 감동적이야?” 우는 아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 사람들은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매를 맞았을까?”
영화 ‘패왕별희’의 한 장면이다.
국군의 날 퍼레이드 훈련의 악몽
일사불란한 국군의 날 퍼레이드를 보면서 그것과 유사한 감정을 느꼈다. 군대를 다녀왔거나 지금 군대에 있는 병사들도 아마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리라. 국군의 날을 맞아 서울시내에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10년 만에 최대 규모라는 설명 덕분인지 매년 불편했던 행사가 올해 조금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양 옆으로 도열된 병사들 사이에서 기세등등하게 나타난 대통령과 장군들은 그걸 보고 즐거워 하는 듯했다.
그런데, 한국의 군대에서 저런걸 보고 좋아할 병사는 아무도 없다. 특히 퍼레이드에 동원된 만여명의 군인들에게 이제 국군의 날은 악몽과도 같이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퍼레이드를 보고 떠오른 군시절의 기억이다. 사단장 이취임식을 앞두고 한달전부터 열병(퍼레이드 비슷한)연습을 하는데 한여름 더위에 병사들이 픽픽 쓰러졌다. 정말 픽~픽~ 쓰러졌다. 쓰러진 병사들은 연병장 가장자리에 나무 그늘에서 쉬게 했는데 병사들이 하도 많이 쓰러져서 나무 그늘이 모자랄 정도였다.
지휘관들의 ‘처방’은 병사들에게 매일 소금 한컵씩을 먹이자는 것이었다. (소금에는 탈진예방 효과가 있다) 아침마다 연병장에 도열한 병사들에게 두당 한컵(필름통)씩의 왕소금이 배급됐다. 물론 고참들이 그 더운날 왕소금을 삼킬리 없었다. 문제는 소금의 양이 너무 많아 연병장에 버릴 수 없었다는 것. 결국 각 소대에 짬안되는 일, 이등병들이 그걸 모두 ‘처리’했다. 매일 왕소금 서너컵을 들이켜야 했던 그해 여름은 아직까지도 짜디짠 기억으로 남아있다.
오늘 시가행진에 참여한 병사들도 올여름 소금맛을 좀 봤을지 모르겠다. 사단장이 받는 열병식이 그정도인데 대통령이 받는 열병식이야 오죽할까. 이건 특별한 무용담이 아니다. 대한민국 예비역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거다. 벌써 10년전 기억이지만 지금의 군대가 당시의 군대보다 자살률이 훨씬 높다는 점을 생각하면 딱히 쌍팔년도 군대이야기라고 할 수도 없다. (군내 자살률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철지난 미스코리아와 꽃목걸이가 함께한 국군의 날 퍼레이드
군인들이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열병, 분열, 퍼레이드 같은 제식행사는 철저하게 외부 전시용이다. 병사들이 저런 의미없는 고생을 하면서 자부심을 느낄 리가 없고, 저런 걸 할수록 군의 사기는 떨어진다. 어제 하루 행사를 위해 장병들은 두 달 동안 천막생활을 하며 예행연습을 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입대한 1만여 장병들이 몇시간짜리 전시용 행사를 위해 몇 달간 훈련을 전폐하고 생고생을 한다. 또 그 병사들의 빈자리(경계, 작업 등등)는 부대에 남은 다른 병사들이 메꿔야 한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어제 퍼레이드의 하이라이트는 미스코리아들과 걸그룹 ‘크레용팝’이 군인들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는 장면이었다. 야만적인 성상품화라는 이유로 일찍이 공중파 방송에서도 퇴출된 미스코리아가 국가행사에 버젓이 등장했다. 그것도 촌스러움의 상징 ‘꽃목걸이’를 들고 말이다. 대로에 대기하고 있던 미스코리아들과 크레용팝은 행군대열이 다가오자 병사들의 목에 꽃목걸이를 걸어줬다. ‘남성성’의 상징 군대와 ‘여성성’의 상징 미스코리아가 조우하는 순간이다.
이 행사를 기획한 꼰대의 예상대로라면 이순간이 가장 빛나야 할 순간이었겠지만 보는 이들에겐 가장 민망하고 구린 순간이었다. 한국이 가부장제 병영국가임을 만방에 과시하는 듯한 퍼포먼스였다. 이걸 기획-연출한 참모진과 주연배우로 출연한 대통령은 저 촌스런 연출로 국군의 사기가 올라가고 적국이 긴장할거라 생각했나보다. 이 참기 힘든 낡음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정한 평화와 군인을 위한다면…
DMZ에 ‘세계평화공원’을 만들고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라는걸 하겠다는 대통령이 수도 한복판에 1만 대군과 탱크부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이렇게 분명한 언행불일치가 또 있을까 싶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과도한 군사·안보 퍼포먼스로 여성대통령으로서의 약점을 보완하려 애썼다. 이제 군복입고 거수경례를 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남한에서도 북한만큼이나 자주 볼 수 있다. ‘선군정치’라는 말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군 통수권자가 꼭 군인 흉내를 내고 거수경례를 해야 하는 건 아니다. 군이 민의 통제를 받는 것이 당연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이 군인 흉내를 낼 이유가 무엇인가? 평생 그런 것들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비장하게 군인코스프레를 하니 보는 사람이 당황스럽다.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옷(대통령, 군인)을 한꺼번에 입고 있으니 하는 이도, 보는 이도 어색한게 당연하다.
장병들의 사기를 위해서도,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도 어제와 같은 퍼레이드는 좋지 못하다.
내년부터는 국군의 날을 ‘대통령과 장군들의 날’이 아닌, 말 그대로 ‘국군을 위한 날’로 만드는건 어떨까? 어린이날의 주인공이 어린이이듯, 국군의 날 하루만큼은 60만 장병들을 이나라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거다. 그것은 매우 쉽다. 탱크도 전투기도 미스코리아도 필요없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장병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대통령과 장군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고, 장병들에게 가장 끔찍한 일은 대통령이 눈앞에 나타나는 일이다. 어제와 같은 성격의 행사들만 없다면 장병들의 삶의 질은 한층 높아질 것이다. 군대는 대통령의 악세사리가 아니다. 나는 대통령과 장군들이 엉뚱한 일로 사병들을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대한민국 군대의 전투력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