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추석 휴일이 길었던 10월이었다.
마치 이달을 위해 살아왔던 것처럼, 나는 휴일을 흠뻑 즐겼다. 즐기려고 했다. 아니, 즐겼어야 했다. 남들 다 가는 해외여행은 몰라도 왠지 어디라도 가야 할 것 같은 압박에 엉덩이가 들썩였다. 집에서 제사를 안 지내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던가, 주변 친구들도 모두 난리가 났다. 친구는 괌에 있는 리조트를 예약했다고 했다. 때아닌 성수기(?)라 표 값이 좀 비쌌지만, 이런 기회가 흔치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연차를 붙여 무려 보름간을 쉬다 오겠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가평에 있는 풀빌라를 며칠이나 빌렸단다. 친구들을 초대해서 먹고 놀며 수영도 하고 푹 퍼져 있을 예정이라고. 마침 그때 즈음이 남자친구와의 기념일이라 딱 좋다고 했다.
초조했다. 나도 남들만큼 맘껏 놀아줘야 하는 게 아닌가. 소문나고 싶었다. 여기저기 잘 놀았다고 동네방네 소문이 나서 누구에게라도 칭찬받고 싶었다. 모두가 먹고 마시는 천하제일 흥청망청 대회에서 게으름의 일인자로 인정받고 싶었다. 발바닥이 근질거리면서 어디라도 떠나야 할 것 같아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갈만한 곳을 물색하고 다녔다.
결국
그렇다. 그 어떤 곳에도 가지 못했다.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마치 전 국민이 단합이라도 한 듯이 어딘가로 떠나는 비행기 표는 모두 매진이거나 아주 비쌌고, 기차표는 추석 본연의 의미에 충실해 고향으로 내려가고 올라오는 사람들로 인해 모두 매진이었다. 운 좋게 가는 표가 생길라치면 올라오는 표가 문제였다.
아니 사실은, 내 마음이 문제였다.
떠나고 싶으면 죽이 됐든 밥이 됐든
훌쩍 떠나면 되련만,괜스레 꼭 하나쯤 트집을 잡아내어
고민을 거듭하다가 끝내는 그
표를 놓치고 마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표가 해결될라치면 가서 잘 숙소가 걱정이었고, 숙소가 해결될 것 같으면 먹을 음식이 걱정인 식이었다. 예정에 없던 여행을 떠밀리듯 가려고 하며 들뜬 척하려다 보니 생기는 일이었다.
결국, 그렇게 나는 아무 곳에도 가지 못했다. 추석 연휴 내내 다음날 회사 일이 피곤할까 봐 미뤄두었던 영화를 실컷 보고, 내가 일이 끝날 때쯤엔 문을 닫아 못 먹던 동네 맛집에 친구와 가고, 모자랐던 잠을 보충하며 늘어져 있었다.
심지어 중간에는 발을 동동 구르는 회사 선배 대신 잔업을 자처해서 하기까지 했으니, 생각했던 대로와 영판 다른 모습으로 휴일을 보냈다. 후회는 없었으나 아쉬움은 있었다. 세기의 휴일이었다는데…. 앞으로 이런 휴일이 있으려면 1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데…. 하는 마음이 계속 한구석에서 나의 준비성을 탓했다.
그런데
이번 휴일이 그냥 추석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친구가 태그한 게시글, 제목이 무슨 ‘특색 있는 지역 축제’ 뭐시기였던 그 글의 설명이 그랬다. 이번 달이 무려 ‘문화의 달’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아닌가. 심지어 이게 갑자기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어언 1972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정해온 것이란다. 나만 몰랐던 게 아니었는지 친구 역시 이렇게 반문했다.
헐, 그래서 이렇게 축제하는 거야?
심지어 이번 달에는 문체부의 가을 여행주간과 추석 연휴가 맞물려서 추석 연휴에 국내 여행을 한 사람들이 재미 깨나 봤을 거라는 것까지 알고 나니 더더욱 아쉬움이 커졌다. 미리 알았더라면 해외여행이나 풀빌라까진 아니어도 내가 방에서만 휴일을 보낼 일은 없지 않았을까….
‘예술’과 ‘밤’이라니 타이틀까지 멋지다.
그래서
나는 당장 여행을 알아보기로 했다. 억울한 마음으로 알아보기 시작한 문화의 달 행사들이, 알면 알수록 꽤 구미가 당기는 게 많지 않겠나. 내가 친구와 가려던 곳 중의 하나인 부산의 자갈치 축제는 이미 끝났지만 말이다. 사실 내가 부산을 워낙 좋아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는데, ‘전국 최대의 수산물 축제’라는 문구가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내일의 나는 다르다. 인간이 학습의 동물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고개를 백번 끄덕이며 옳다고 소리치고 싶다. 10월, 날씨가 청명하고 편한 옷에 외투 하나를 걸치고 돌아다니면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온과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은 쾌청한 대기 상태가 우리를 즐겁게 하는 달이 아닌가. 하늘이 높고 말도 살찌는 달이라는데 인간이라고 그 호시절을 그냥 보낼 수는 없다.
문체부에서 문화의 달을 지정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노린 것이 아닌가 싶다.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거창한 계획이나 준비가 없더라도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
무려 한 달 내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각 지자체와 매체들에서 사회적 가치와 문화의 부흥을 위해 일 년 동안 준비해온 작품을 내놓는다.
서울 도심에서 계획되고 진행된 행사나 공연만 해도 꼽을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다. 문화의 범주에 빠지는 것도 없다. 작게는 대중매체의 콘텐츠와 먹거리부터 전통적인 행사와 지역색이 가득한 지역축제까지. 불꽃놀이 행사조차 전국 여기저기에서 쏘아 올려지는 풍요로운 10월, 문화의 달이다.
나들이하기 좋은 날씨, 활동적인 행사에 참여해도 꿉꿉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고 먹을 것을 들고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하더라도 쉽게 지치지 않는 날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추석 때 친척모임과 제사 때문에 지치고 시달려 가족끼리의 단합을 도모하지 못해 속상하고 아쉬웠다면, 정말 지천에 널린 행사 중 하나라도 골라잡으면 어떨까?
가만히 앉아서 보는 공연부터 가족 다 같이 참여할 수 있는 콘텐츠가 사방에 대기 중이다. 늘 똑같은 데이트에 질린 커플들에게도 10월은 희소식이 가득한 달이 아닐 수 없다. 축제나 행사라는 게 구경만 가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니까.
역대급 추석 연휴처럼 10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이번 달을 놓치면, 또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물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각 지자체와 단체들이 돌아올 10월을 위해 각종 기획과 준비를 하며 노력을 쏟아붓겠지만, 지금 2017년의 10월은 돌아오지 않는다.
즐기자. 남은 10월의 날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