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알통 굵기가 정치 신념을 좌우’한다는 뉴스가 세간의 비웃음을 산 적이 있다. 통계상 근육량이 많은 사람은 보수적 성향을,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진보적 성향을 갖는다나 뭐라나.
유전자가 정치 성향을 결정한다는 뉴스의 논리는 자칫 우생학적인 추론으로 이어질 수 있어 위험하다. 차라리 건강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 정도의 시간과 자본을 가진 사람이 정치적으로 보수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짓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여자라는 문제』의 저자 재키 플레밍은 ‘알통설’만큼이나 억지스럽고 우스운 명제가 역사적으로 여성들에게 강요되었음을 지적한다.
남자라는 권위: 거짓 원인의 오류
사람들은 종종 이런 식으로 말한다.
“성범죄 피해자들은 대부분 여자인 이유? 남자는 여자보다 성욕이 강해서 그래. 왜 사회 고위층은 죄다 남자냐고? 남자가 능력이 더 좋으니까. 남성 위인이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지? 남성이 우월하기 때문이야.”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만 인과 관계를 따지면 단 하나의 문장이 도출된다.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 불평등을 옹호하기에 이보다 편리한 논거는 없다.
이토록 단순하고 무지한 주장을 펼친 사람 중 하나가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이라고 한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관념을 뒤집고 과학적 패러다임을 제시한 업적과 달리, 남성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그의 논리는 맹신에 가까웠다.
다윈의 맹신은 21세기에도 어김없이 이어진다. 과거와 다르게 요즘 여자들은 너무 드세서 문제라고 한다. 그런데, 단 한 번이라도 여성이 문제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을 주문처럼 외는 곳에서 말이다.
이 땅을 벗어나면 좀 나을까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바다 건너 사정 또한 다르지 않다. 『여자라는 문제』는 바로 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벌어지는 ‘한심한 역사’를 지적한다.
교양 있는 그들의 실체: 은밀하고 위대한 여성 혐오
누군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이 책 내용대로면 다윈도 여혐종자겠네. 근데 왜 그 사람이 지금까지도 모든 학문의 근간이 됐겠어? 그럼 다른 사람들은 바보게?”
맞다. 당신이 신봉하는 그 천재들이 사실은 멍청하리만큼 남성 우월주의를 주창했다. 프로이트는 말할 것도 없고, 여자가 과학을 공부하려면 수염을 기르라 조롱했던 칸트, 평생 여성을 증오하고 비하했던 쇼펜하우어, 루소, 모파상, 러스킨 등등…….
그들이 천재로 살 수 있었던 과거에는 남성의 지위는 권력을 낳았고 권력은 지위를 재생산했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동안 여성의 존재는 지워졌다.
혐오의 역사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피카소는 여러 여성을 뮤즈로 삼았다 버리면서 그들의 삶을 황폐하게 했으며, 현대 신경학의 기초를 세운 샤르코는 히스테리 증상을 전시하기 위해 루이즈 오귀스틴 글레이즈라는 여자를 매주 무대에 세웠다. 오랜 시간 여성은 철저히 객체, 더 나아가서는 비체로서 기능해야만 했다.
재키 플레밍은 이를 “‘역사의 쓰레기통’에 처박혔다”라고 표현한다. 여성이 ‘남성처럼’ 위대한 평가를 받는 순간 남자들은 해당 역사를 쓰레기통에 버림으로써 ‘실수’를 바로잡았다는 것이다.
여자가 의학을 공부하면 가슴이 볼품없어질 것이라며 비의학적 논리를 주장했던 헨리 모즐리는 멕시코 황녀의 주치의였으나, 쓰레기를 던지는 훼방을 이겨내고 시험에 통과해 군의관이 된 마거릿 앤 벌클리는 죽을 때까지 남장을 하고 지냈다. 헨리 모즐리와 마거릿 앤 벌클리, 두 사람의 간극은 여성의 지능을 과소평가하면서도 남성의 자리를 넘볼까 견제했던 남성 중심사회였기에 발생한 것이다.
문제적 여자의 해답: 진짜 문제를 직시하기
관념뿐 아니라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에서도 여성은 속박당했다. 근육 없이 가냘픈 다리와 내장이 손상될 만큼 꽉 조인 허리를 강요받았는데, 이는 명백히 건강하지 않은, 활동에 비효율적인 몸의 형태다. 게다가 클리토리스가 수백 년간 탐구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성적 쾌감조차 제대로 누릴 수 없었다. 자, 이래도 문제가 여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자를 둘러싼 세상에는 정말 문제가 없었나?
『여자라는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통해 소중한 가치를 보여준다. 여자라는 문제의 모순과 허점을 살펴봄에 따라 진짜 문제를 직시할 수 있다는 것. 시종일관 능청스럽게 풍자를 늘어놓던 저자가 얼핏 진심을 내보였던 문장이 다시금 힘을 싣는다.
“여자들은 수천 년 동안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서로를 끌어내 구해주고 있다네.”
역사의 쓰레기통을 뒤져 구할 것은 건져내고 밖에 나도는 쓰레기를 발견하는 일이, 여성이라는 문제를, 마침내는 진짜 문제를 풀어내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일상과 사회에서 여성 혐오의 맥락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자라는 문제』의 풍자를 온전히 읽어낼 수 없을까 우려스럽다. 하지만 저자는 친절하게도, “누구의 말도 그대로 취하지 말지어다”라는 문장을 인용하며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안내한다.
제목에 공감하며 기쁜 마음으로 책을 펴든 사람들은 여성의 열등함을 확신하며 미소 지을 것이다. 어쩌면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매우 못생긴,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해 삐뚤어진 여자만이 동의할 내용’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좀 어떤가. 한 명이라도 더 ‘진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면야, 멍청한 일부로부터 문제시되는 것쯤이야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여성은 얼간이들에게 늘 문제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