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역설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만이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존감이라는 독(p. 34)
자존감. 혹은 자아존중감(Self-esteem). 요즘 주위에서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심리학 용어일 것이다.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는 말들이 요란하다. 소위 자기계발서에서 주장하는 온갖 ‘비결’의 기대 효과는 이제 자존감이 되었다.
막연히 너도 나도 생각한다. 대인관계 원만하고, 행복하고, 삶이 지루하지 않고, 보람 있고, 돈도 잘 벌고, 적당히 명예도 있고 그런 두루두루 좋은 것들은 으레 자존감과 연결되어 있으리라는 추측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중 영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존감 개념에는 우리가 모르는 ‘부작용’도 상당하다는 것이 다수의 심리학 연구 결과들을 통해 입증되었다는 점이다.
불편하다. 물론 불편하고 듣고 싶지 않은 얘기다. 듣기에도 좋고, 말하기에도 좋은 자존감 이야기에 감히 찬 물을 끼얹으려 하다니. 그래서일까? 맹목적인 자존감 추구 현상에 우려를 표명하는 시도들은 생각보다 매우 비참한 대접을 받고 있다. 아직까지 ‘자존감 열풍’은 식을 줄 모른다. 그래서 소위 ‘자존감 까는 이야기’들은 환영을 받기가 어렵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도 없잖은가. 진정으로 건강한 자존감을 얻고자 한다면, 자존감에 대한 불편한 이야기들에도 기꺼이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자존감은 만능열쇠가 아니다. 추구해도 되는 ‘진짜 자존감’이 있는 반면, 추구하면 안 되는 ‘가짜 자존감’도 있다. 당신은 이것들을 구분해낼 수 있는가? 어설프게 자존감 좇다가 오히려 이전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 결과를 도대체 누가 책임져줄 것인가?
『자존감이라는 독』의 저자 류샹핑은 자존감의 긍정적 기능을 부정하지 않는다. 책 제목과 걸맞지 않게, 그는 자존감을 개념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다. 단 몇 페이지만 넘겨 봐도 자존감을 향한 애정을 물씬 느낄 수 있다.
자존감이 높으면 얼마나 좋은지, 자존감이 낮다면 그것은 또한 얼마나 비극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무릇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지닌 단점까지도 수용할 줄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존감 개념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개념의 가치를 보다 널리 알리고 싶었다면 자존감 개념이 가진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 또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스스로부터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선은 공평하다. 건강한 자존감과 부실한 자존감을 한 번씩 번갈아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러는 사이 독자들의 머리 속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쉼 없이 온탕과 냉탕을 오고 간다.
‘자존감은 좋은가, 나쁜가?’ 여기까지만 와도 성공한 거다.
아이들에게 자존감을 길러 주는 방법 중 이런 것이 있다. 날마다 거울을 보며 “나는 멋진 사람이야. 성공을 바라면 반드시 이룰 수 있어. 나는 해낼 수 있어.”라고 자신에게 말하게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친구들끼리 단점은 지적하지 말고 장점만 이야기하게 하고, 교사도 학생들의 단점보다는 장점만을 부각해서 칭찬한다. 그런데 이런 훈련은 자존감이 낮은 아이들에게는 별로 효과가 없으며, 자존감이 높은 아이들에게는 자기 과대평가나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더욱 부추긴다.
(p. 120-121)
서양 문화에서는 높은 자존감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서양인들은 높은 자존감이 심리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과대평가한다. 한 예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정부가 아동들의 자존감 향상을 위한 교육에 해마다 25만 달러씩 투자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의 자존감이 높아지면 따돌림, 범죄, 미성년자의 임신, 학업 수준 저하 등의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계획한 프로젝트였다. … (중략) …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자존감 교육에 대한 의구심, 특히 높은 자존감의 신비한 효과에 반박하는 주장이 나타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가 실시한 자존감 교육을 분석해 본 결과, 기대한 효과는 전혀 나타나지 않은 완전히 실패한 프로젝트였음이 드러났다.
(p. 220-221)
사실 새로운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가 하던 일들, 막연히 옳다고 생각했던 일들의 반복이다. 어느 자기계발서나 주장하는, 어느 심리에세이나 주장하는 그런 비법들 말이다. 즉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류의 시간을 늘리는 것, 좋아하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물질적으로 재단할 수 없는 가치(value)를 발견하는 것 등등의 활동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자존감을 얻는 노력들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자존감을 획득할 것이 아니라, 높아진 자존감을 확인할 일을 기대해야 한다. 그래 맞다. ‘획득’이 아닌 ‘확인’이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자존감이란 의식적으로 추구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자존감은 도구가 아니다. 방법론도 아니다. 그저 결과물일 따름이다. 행복하게 살다 보면 어느새 ‘스며들어 있는 것’이 곧 자존감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높은 자존감을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아무리 얻고자 해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불행한 사람일수록 행복을 갈망하지만 그럴수록 행복해지기는 힘들다. 행복은 만족감을 높인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심결에 느끼는 것이다. 행복을 의식적으로 손에 넣으려고 하면 그것은 오히려 더 멀어진다. (p. 260)
우리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의 특징을 따라 한다 해서 자존감을 높일 수는 없다. 결국 낮은 자존감을 만들어내는 ‘본질’은 변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따라서 단지 ‘자존감’을 추구하려는 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자존감 개념이 지닌 그늘 속에 들어가 자존감의 본질을 고민하는 것이 순서다. 자존감의 냉탕과 온탕을 오고 갈 수 있어야 비로소 ‘진짜 자존감’과 ‘가짜 자존감’을 구분할 수 있는 통찰이 생긴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가짜 자존감을 쳐내며 진짜 자존감을 향해, 낭비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신도 모르게. 나중에 자존감이 높아지고 나서야 그것이 ‘확인’될 수 있게끔.
내가 지금까지 ‘가짜 자존감’에 휘둘려온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자존감이 높아지질 않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면, 이제는 자존감의 숨겨진 실체를 한 번 들여다봐야 할 때가 아닐지.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