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벌어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재난. 그것은 숙취다. 밤사이 그렇게 달콤했던 소주와 당신의 관계는 아침 해가 뜨자마자 서로를 부정한다. 오장육부는 트리플악셀을 뛰고, 머리는 박수갈채 대신 뇌를 우다다 난타한다. 결국 당신은 술에게 이별을 고한다.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개다” 그렇게 인생 2막이 시작되는 것이다. 강아지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왈왈.
숙취에 바닥을 기어본 사람만이 숙취해소음료의 가치를 안다. 나에게 맞는 숙취해소음료를 아는 것은 좋은 술친구를 얻은 것만큼 중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술에 떡이 되어 좀비처럼 아무거나 사서 마시기 일쑤다. 보통 음료보다 가격도 비싸서 여러 병을 사기도 부담이 크다.
연말연시라는 만취 시즌을 맞아 준비했다. 시중에 파는 거의 모든 숙취해소음료. 마시즘이 대신 취하고 마셔본다. 오늘은 숙취해소 음료에 대한 실험이자, 당신의 가까운 위기를 구해줄 재난 대비 매뉴얼이다.
실험방법: 밤에는 술, 아침에는 숙취해소음료, 3주 동안
회식에서 “술은 좋아하지만, 잘 못 마셔요”라고 말하는 깍쟁이 마시즘. 그는 숙취해소음료 실험의 아주 좋은 실험쥐다. 맥주 1캔을 마셔도 아침에 바닥에서 수영하니까 술값을 아낄 수 있다. 그런데 매일 맥주를 2캔씩 마신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마셨다. 어김없이 늦잠을 잤고 해롱해롱 하며 나타났다. 무려 3주 동안이나. 직장동료 및 지인들은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걱정했다. 그들은 몰랐다. 이것은 숙취해소음료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한 아주 정교한 실험이었다는 것을. 실험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 밤 12시마다 같은 맥주 2캔을 마신다
- 아침 출근길 숙취해소 음료를 산다
- 오전 10시 숙취해소음료를 마신다
- 몸이 깨는 순간을 기록한다(1시간 단위)
숙취해소 음료의 효과는 개인별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혼자 실험을 하되, 실험 환경과 조건을 공평하게 맞추려고 노력했다. 이 말은 즉 3주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각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프로답게 평일에는 빠지지 않고 맥주를 마셨지만 주말에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매일 아침에는 숙취해소음료의 맛을 기록하긴 했다. 하지만 비교를 통해 맛을 기록하는 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숙취해소음료 14종을 다시 모아서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다. 빛깔과 향, 맛, 목 넘김, 마신 후의 여운 등을 기록했다. 한 잔을 마시고 난 후에는 양치와 물 마시기도 잊지 않았다. 나는 숙취계의 소믈리에니까.
14종의 숙취해소음료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마시즘의 과거 포스팅 「인생은 짧고, 숙취는 길다」에서 말했듯이 초코우유나 과일주스 등 민간요법(?)들이 존재한다. 허나 이번 실험에는 포장에 ‘숙취해소’라고 당당히 적은 프로페셔널만 골랐다. 근방 500M 내의 편의점을 털었더니 총 14종의 숙취해소음료가 나왔다.
숙취해소음료들을 일일이 말하면 읽는 사람이 숙취에 걸릴지 모르므로 티어(등급)를 나누었다. 숙취해소 효과나 맛에 따른 구분이 아닌 오로지 인지도다. 티어가 높을수록 우리가 손쉽게 만날 수 있다. 자 그럼! 출바알!
1티어
컨디션은 숙취해소음료계의 1선발이다. 1992년 출시된 가장 오래된 숙취해소음료이며, 현재까지 가장 많이 팔리는 숙취해소음료다. 요즘 판매하는 5세대 컨디션은 ‘헛개’가 기본 베이스다. 친숙한 브랜드라 표준적인 맛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가장 공격적으로 시큼하다고 판별되었다. 숙취해소 효과는 다른 녀석들과 비교했을 때 중상(1시간 반~2시간).
컨디션 레이디는 공격적으로 시큼한 컨디션의 맛을 대중적으로 완화시켰다. 컨디션이 식초라면 이쪽은 사과나 포도주스의 느낌이 난다. 맛에 민감한 남자라면 여자친구 선물하는 척 구매해서 내가 마시자. 다만 맛은 업그레이드가 된 대신에 체감 성능은 약간 다운그레이드(2시간 초과)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컨디션CEO는 무려 1병에 1만 원이다. CEO가 아니면 마시지 말자. 혹은 CEO와의 술자리에서 선물로 줘도 괜찮을 것 같다(딸랑딸랑). 컨디션 라인의 시큼한 맛이 아닌 진중한 향과 고급스럽게 쓴맛이 난다. 숙취해소 효과도 중상(1시간 반~2시간). 하지만 여전히 배가 아픈 것은 그놈의 가격 때문에.
여명은 주당이라면 꼭 챙겨야 할 올드스쿨 혹은 클래식이다. 807번의 실패를 겪고 만들어낸 여명808.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줬다면 남종현 회장은 우리에게 여명을 선사하셨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명808의 5,500원이라는 비싼 가격이, 응답하라 1988에 온 듯한 캔 디자인이, 한약방에 갇힌 듯 아재스러운 맛과 향이 거부감이 들지만 여명808은 내 몸안의 숙취를 멱살을 잡아서라도 끌어낸다. 효과만 보면 클래스가 다르다. 최상위권(30분~1시간 30분) 기록.
여명에도 프리미엄 버전이 있다. 여명 1004. 가격이 천상계로 1캔에 1만 원. ‘천사들을 위한 음료’라고 적힌 문구에 어디에 기부라도 하는가 했는데, 아마 술독 때문에 천사가 되기 일보 직전이라면 마시라고 만든 듯하다. 여명에 비해 단맛이 더 강하고, 넘긴 후에 뜨거운 느낌이 세다. 여명과 마찬가지로 최상위권(30분~1시간 30분) 기록. 하지만 다른 주당의 말에 의하면 이쪽이 1.5배 효과가 좋다고 한다.
모닝케어는 소비자 맞춤형 숙취해소음료다. 컨디션과 여명은 오리지널의 맛과 성분을 확장하거나, 변형하여 제품을 만든다. 하지만 모닝케어는 각각 제품의 성분과 맛이 다른 게 특징이다. 1티어 중에서는 가장 맛있다.
먼저 모닝케어. 저 기지개 켜는 남자는 대체 어떤 회사에 다니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모닝케어는 기지개만큼 상쾌한 느낌을 주는 숙취해소음료다. 향은 달콤한 꿀물 향이 조금 느껴지고, 새콤한 과일주스 맛이 난다. 숙취해소 효과는 중간(2시간 초과)이지만, 숙취와 별개로 건강한 맛이 있다.
모닝케어 레이디는 베리 주스의 맛을 가득 내었다. 숙취해소음료 특유의 절망적(?) 분위기를 싫어하는 여성들에게 확실히 어필할 법하다. 피부에 좋다는 콜라젠도 넣었다. 음주 후 푸석푸석한 피부를 예방…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평소에도 푸석푸석하니까. 효과는 모닝케어와 비슷(2시간 초과)했다.
모닝케어 강황은 독특하다. 일단 카레 색이 강한 음료 색깔에 예상했지만, 어디에서 강황을 마구마구 갈아 넣은 건지 마시자마자 화끈함이 혀와 목을 스쳐 지나간다. 추운 날 집에서 마시는 진한 생강차의 기분이다. 개인적으로는 강황이 잘 받는 몸이라 숙취해소 시간은 중상(1시간 30분~2시간)이었다.
2티어
2티어의 숙취해소음료는 컨디션, 모닝케어처럼 확장판이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의미 있는 인지도를 가진 녀석들이다. 세련된 디자인으로 성능과 효과를 챙기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나름 힙한 술꾼으로 보일 수도 있다.
레디큐는 조만간 1티어에 오를 숙취해소 음료다. ‘맛있는 숙취해소음료’를 기조로 삼아서인지 과채주스를 마시는 느낌이다. 숙취해소 시간은 중간등급(2시간 초과)이지만, 이 녀석은 젤리 버전으로 나오면서 숙취해소음료의 돌연변이 장을 열었다. 요즘 나오는 숙취해소 아이스크림 같은 변종들이 다 이 녀석 탓이다.
외국에서 인정하는 숙취해소음료 ‘갈아만든 배’다. 심지어 한글을 몰라서 배를 ‘IdH’라고 읽는다는 루머도 돌 정도다. 이 갈아만든 배가 드디어 숙취해소 음료 버전으로 탄생했다. 일반음료 출신이어서인지 맛으로 따지자면 적수가 없을 정도로 달고 시원하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가격은 4~5배가 올랐는데, 효과는 조금 보강된 정도(2시간 초과)라는 게 아쉽다. 그만큼 오리지널 ‘갈아만든 배’가 갓성비의 음료다.
프로야근러(ME!)가 마시는 직장인 최후의 물약 정관장이 숙취해소음료 369로 나왔다. 세월이 느껴지는 고품격 디자인에 한약방의 냄새도 정관장스럽다. 평소에 정관장을 자주 접했다면 익숙한 맛있는 쓴맛이 난다. 숙취해소 효과는 중상(1시간 30분~2시간)으로 2티어 중 가장 높았다. 물론 가격도 6,000원으로 제일 높다.
3티어
3티어들은 숙취해소음료계의 후발주자다. 괜찮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맛과 성능의 특징이 뚜렷하지 못하거나, 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룹이다. 이미 1-2티어에서 숙취해소음료들의 스펙트럼을 보여줬기 때문에 빠르게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술고래 김과장의 비밀. 알고 싶지 않다. 이름을 잘못 지었다. 끝…이라고 하면 아쉬우니까. 사실 이름 빼면 맛이 신기한데. 봄비가 내리듯 혀 위에 쓴맛이 쏟아지는 게 아니라, 혀 아래에서 쓴맛이 당기는 게 신기했다. 차라리 맛 쪽이 비밀이었던 걸까. 숙취해소 효과는 중하(2시간 초과) 정도로 아쉬웠다.
다음은 일본대표 우콘파워(ウコンの力)다. 짙은 노란색을 띠고 있으며 생강향이 미묘하게 느껴진다. 마셔보니 살짝 시큼한 첫 모금 후에 목에 보일러를 트는 느낌이 올라온다. 강하지 않은 한약을 달여먹은 기분이다. 물론 이쪽이 먼저겠지만, 한국의 모닝케어 강황과 맛도 효과(1시간 30분~2시간)도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마지막은 헛개파워. 3티어에 넣기에는 미안한 광동제약의 숙취해소음료다. 헛개가 베이스기에 이 구역의 일인자 컨디션과 비교가 된다. 사실 이쪽이 먼저 나왔다면 표준이 될만한 맛이다. 시큼하고 쓴맛의 밸런스가 괜찮기 때문이다. 성능 또한 양호(1시간 30분~2시간)하다. 가격도 나름 저렴하다. 이 정도면 이득이지만 특징이 없어서 마신 사람들이 헛개파워를 기억하련지는…
총평: 숙취해소음료, 모두 마셔보니 알겠더라
전문가들은 숙취해소음료의 성분에 대해 말한 뒤에 언제나 “가장 좋은 숙취예방법은 술을 적게 마시는 것입니다”라는 마무리 멘트를 날린다. 바보들. 누가 그렇게 많이 마실 줄 알고 술 마신 건가… 사실 기왕 취한 거 나에게 잘 맞는 숙취해소음료 하나쯤은 알아두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한계 또한 있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만취 상태가 아니어서 직립보행이 가능했다는 점(다음에는 병가를 각오하고 더 많이 마셔야겠다). 또한 과학적인 팩트가 아닌 느낌적인 결정으로 숙취해소 상태를 판단하는 문송한 짓을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숙취의 원인과 해소 과정은 과학적으로도 미지의 영역에 남아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의미 있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 여명 아래 효과는 비슷비슷하다는 것(물보다는 나음)
- 여명이 싫다면 맛으로 숙취해소음료를 골라도 될 정도로 다양하다
- 하지만 프리미엄 숙취해소음료를 마실 바에는, 비싼 술을 사서 조금만 마시자
- 왜냐하면…
원문: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