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울신문과 청년실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지면상 불가피하게 요점만 보도되었다. 이왕 기사가 나왔으니 이 주제와 관련된 평소 내 생각을 드러낼 기회로 삼고 싶어 글을 쓴다.
불쌍한 청년들, 일자리 좀 주세요
실업(失業)이란 일을 잃은 상태를 의미한다. 일을 잃었느니 놀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놀고 있어도 이런 상태는 실업이 아니다. 예컨대, 이제 갓 중학생인 내 조카는 공부에 전념해야 하고, 너무 어려 일할 능력도 없다. 일을 하지 않는 상태이지만 조카는 실업자가 아니다. 일할 ‘능력’을 아직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65세가 넘은 노인도 마찬가지다. 일하기에 노쇠했다.
1. 자발적 실업자는 없다.
반면 내 아내는 아직 일할 능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일하고 돈벌이에 지치고, 자기 삶에 충실하고 싶어 일의 중단, 곧 퇴직을 선택했다. 일할 능력은 있지만 그 ‘의사’가 없는 것이다. 이 경우에 처한 사람도 실업자가 아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이를 ‘자발적 실업자’라고 부른다.
실업(失業)은 결국 업(業), 곧 일을 수행할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일을 수행할 의지가 있는데도 할 일이 없어 놀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앞의 자발적 실업자와 비교해 우리는 이를 ‘비자발적 실업자’(involuntary unemployment)라고 부른다.
이처럼 우리는 실업을 자발적 실업과 비자발적 실업으로 구분하는데 익숙해져 있지만, 나는 이런 구분법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내 아내의 경우를 보면 일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 일의 중단을 스스로 선택한 상태인데, 이는 사실 우리가 정의한 실업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실업이 아니라 놀고 싶어 놀 뿐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생각하면 ‘자발적’ 실업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발적 실업’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내가 이 용어를 끈질기게 물고 있는 이유가 있다. 이는 신고전파, 곧 주류경제학자들이 주조한 용어인데, 여기에는 실업의 ‘자기선택성’과 ‘자기결정성’의 의미가 담겨 있다. 주류경제학은 실업을 가능한 한 자발적 선택의 결과로 해석하려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현재의 모든 실업을 자발적 실업으로 해석해 지금이 ‘실업제로사회’임을 선포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니 스스로 해결해야 함이 마땅하며, 따라서 국가의 실업정책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자발적 실업’을 보수주의의 열망이 강력히 반영된 이데올로기적 용어라고 판단해 왔다. 이 뒤죽박죽 용어는 경제학 교과서에서 삭제되어야 한다!
2. 비자발적 실업
‘비주류경제학’의 입장은 다르다. 모든 실업은 자기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환경과 체제, 곧 사회적 구조에 의해 강요된 결과일 뿐이다. 이는 우리가 앞에서 정의한 실업의 개념 곧, 일을 수행할 능력이 있고 일을 수행할 의지가 있는데도 할 일이 없어 놀고 있는 상태와 일치한다. 실업은 그 자체로 비자발적이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모든 ‘실업’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강요되었다. 따라서 국가에 의해 시행되는 강력한 실업정책이 필요하다.
가족을 제외하면 직업상 내가 가장 자주 만나며, 가장 관심을 갖는 사람은 청년들이다. 말 그대로 그들은 푸르다. 푸름은 생명과 역동성을 상징하는 색이다. 내가 이들을 매일 교육하는데, 일할 능력이 없을 리 없다. 나는 판단력, 결정능력, 창의력을 위해 경제학을 인문학적으로 가르친다.
그리고 21세기 사회가 요구하는 실무능력을 기르기 위해 통계적 처리능력을 철저히 훈련시킨다. 내가 직접 가르치지는 못해도 빅데이터를 처리할 역량에 대해서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며, 서적과 학습경로를 제시해 준다. 그리고 이 청년들의 노동의지는 충만하다. 물론 공부 안하고 놀려고만 하는 유아적 친구도 발견되지만 그건 정말 사소한 경우다.
그런데 이런 게 쓸모가 없다. 일할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공급은 넘치지만 노동수요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이 상황에서는 놀지 않을 수 없다. 노는 것, 실로 비자발적이다.
3. 교육정책과 청년실업
일자리가 왜 없는가? 평소 나는 세 가지 정도가 주된 원인이라고 생각해왔다. 첫째, 교육정책이 문제다. 18세기 중반 이후 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변해왔다. 신슘페터리언 경제학(Neoo-Schumpeterian economics)에 따르면 18세기 중반 1차 산업혁명 후 네댓 번의 ‘패러다임적 변화’를 겪어왔는데, 20세기 말부터 새로운 패러다임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요즘 회자되는 ‘4차 산업혁명’은 사실 신슘페터리언 경제학의 관점에서 출발했다고 봐야한다. 학술적 족보도 모르는 자들, 특히 자신의 경제학 족보를 스스로 부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휘젓고 다니는 얼치기 경제학 교수들을 보고 있자면 우프다 못해 가련하다!
아무튼 신슘페터경제학자들이 이런 변화를 굳이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칭한 데는 이유가 있다. 기술의 변화는 물론, 경제적, 제도적 변화, 곧 사회의 ‘총체적 변화’마저 일어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 바뀌면 그 시대를 지배하는 언어(language)도 변한다. 조선시대를 한자가 지배하고, 20세기를 영어가 지배하듯 21세기를 지배하는 언어가 등장한다. ‘컴퓨터 언어’다!
요즘 ‘문송’이란 말이 회자된다. 문과를 졸업해 죄송하다는 의미란다. 하지만 나는 인간사회에는 인문학이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해 오고 있다. 여타 경제학자들과 달리 나는 인문학을 홀대하는 사회, 인문학을 수치로 여기는 21세기 ‘자본주의 지성’이 ‘문송’ 문화를 머지않아 후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인문학이 모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패러다임적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많은 인문사회계 청년들을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게 할 능력을 가르치지 못한 인문사회학자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정작 죄송해야 할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다.
인문사회학자들이 무능하면, 정부라도 나서야 한다. 나는 21세기의 새로운 언어, 곧 컴퓨터 언어에 익숙하게 함으로써 인문사회계 청년들이 죄송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21세기 언어가 결합될 때 가장 창의적인 성과를 이룰 분야가 인문사회계열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패러다임으로 훈육되어 온 인문사회계 졸업생들이 새로운 ‘사무직’에 부적합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패러다임에 맞는 교육정책으로 청년실업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다는 말이다.
4. 노동정책과 청년실업
청년실업이 발생하는 두 번째 원인을 나는 노동정책에서 발견한다. 요즘은 멕시코가 단연 선두주자이지만 우리나라 노동시간은 줄곧 OECD국가 중 가장 길어왔다. 멕시코와 한국의 경제규모와 GDP격차를 고려하면, 한국의 노동시간은 여전히 가장 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연 2069시간(2016년 기준)은 OECD평균(1764시간)보다 무려 305시간이 더 많다.
1인당 법정노동시간 35시간을 지키고,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시간만큼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해도 청년고용은 좀 더 늘어날 수 있다. 기업은 이 법을 절대 자발적으로 지키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국가의 강력한 노동정책이 필요하다. 국가가 자기의 의무를 외면하면서 청년실업을 걱정하고 있는 건, 뭘 모르거나 후안무치하다.
5. 꼰대와 청년실업
세 번째 이유로 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적지 않은 분들이 싫어할 만한 말을 해야겠다. 처음에 언급한 바처럼 세상은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 제도경제학에 의하면 세상이 바뀌는 이유는 기술(technology)과 제도(institution) 때문이다.
패러다임적 변화가 일어나면, 과거 패러다임은 현재 패러다임과 불화를 겪게 된다. 극단적으로 과거시대의 지식과 제도는 불필요하게 된다. 심지어 그것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항해 싸우면서 새로움을 억압하고 탄압한다.
과거 패러다임의 수호자는 바로 과거 세대다. 물러나야 할 세대가 이토록 완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새로운 세대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우리나라의 조직은 현재 ‘역피라미드’의 모습을 띠고 있다. 물러나야 할 세대가 다수이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무지하기 때문에 일할 능력이 없다! 그러니 매일 잔소리나 지껄이고, 보고서 트집 잡아 신참을 괴롭히는 게 일이다. 평생 그렇게 살아 왔던지라 단합대회, 등산, 회식이나 주최하며 신세대를 괴롭힌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최상층부에 포진하면서 의사결정을 새로운 패러다임과 어긋나게 내리는 것이다. 답이 없는 꼰대들이다!
꼰대들의 수가 많다보니 모든 정책이 꼰대를 위한 정책 일색이다. 정년이 연장된다. 어떤 대학에서는 대학교수의 정년이 70세로 연장되었단다. 극히 일부를 제외할 때, 60세가 넘으면 연구가 쉽지 않다. 청년들이 실업자로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진보주의자들은 실업문제는 ‘계급적 차원’으로 바라봐야 한다면서, 나의 ‘세대론적 관점’을 대단히 비판적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결과에 대한 원인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원인을 다양한 곳에서 발견해야 전체 문제가 해결된다. 일원론(monism)에서 벗어나 ‘다원론’(pluralism)으로 경제를 보는 게 현실적일 뿐 아니라 정책적으로 유익하다.
6. 복지정책과 퇴직
이제 좀 더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갈 차례다. 빨리 퇴직해 버리면 어떻게 사나? 만일 ‘적절한’ 수준의 정년이 확보된다면, 그 다음 기간은 ‘사회복지제도’로 보완되어야 한다. 복지가 뒷받침되지 않는 퇴직은 곧 죽음이다.
그러니 퇴직에 대해 죽음을 불사하는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복지제도로 뒷받침될 때 은퇴는 형벌이 아니라 축복이 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그 덕에 푸른 세대들의 생명과 역동성을 구경할 수 있으니 사회가 더 즐거울 것이다.
7. 수요주도경제학과 청년실업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참에 나는 또 다른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고 싶다. 인문사회계열 청년들을 새로운 패러다임변화에 맞게 교육하자는 첫 번째 방안은 공급자 뜻대로가 아니라 시장의 수요에 맞게 인력을 공급하자는 말이다.
곧, 대학이 ‘수요자’ 중심으로 인력을 공급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해야 한다지만 청년들에게 휘발유를 안고 불에 뛰어들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노동시간을 단축시켜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자는 두 번째 제안도 비슷한 생각 위에 서 있다. 기업은 줄창 일만 시키면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모두 공장과 사무실에 틀어 박혀 일만하고, 밖에서는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그 상품은 누가 사 줄까?
수요가 없으면 공급은 무용지물이다! 주당 35시간만 일해야 소비할 시간이 확보되고, 여분의 시간에 청년들이 취직해 월급을 받아야 물건도 팔린다. 기업들이 ‘수요측면’을 고려해야 할 이유다.
복지 없는 퇴직도 마찬가지다. 복지가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일이 없으면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한다. 손가락만 빨면 소비할 수 없다. 퇴직자의 수요가 없으면 청년층의 노동결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복지 없는 퇴직은 수요 없는 공급과 같다. 그러면 두 세대는 함께 죽는다. 복지를 통한 ‘수요 확대’가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완결판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거다.
‘공급’ 주도 경제로부터 ‘수요’ 주도 경제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청년실업이 해결된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 경제정책의 ‘경제학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한다. 과거 패러다임 학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어 이게 쉽지 않을 것이며, 그 때문에 청년실업문제 해결도 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 지면이 좁았던지 마지막 내용이 누락되었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재삼 강조하고 싶었다.
원문: 한성안 교수의 경제학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