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상실의 시대
한 주간지에 실린 커버스토리 제목이다(기사 링크). 유독 자존감이 뚝뚝 떨어질 만큼 세상살이가 어려워진 것인지, 아니면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아 두던 울분이 터져 나와 그것이 ‘자존감’이라는 명분으로 실체화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보다는 가족, 친구, 동료, 회사, 국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던 한국인들이 비로소 시선을 내부로 돌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확실히 자존감 부족을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행복도 좋지만,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자존감,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자존감을 높이는 것은 좋다 이거다. 스스로를 용서하거나 사랑하든, 스스로가 진짜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든, ‘미움받을 용기’를 낼 수 있든, 어떻게든 자존감을 높이려는 시도는 그리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상당수 자존감 담론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높은 자존감을 획득하고 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것이다.
행복해질까? 인간관계 속 근심이 사라질까? 부자가 될까? 아니.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장밋빛 미래가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존감에 대해 깊이 연구해 온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단지 자존감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높은 자존감을 ‘다루는’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고.
상상해보자. 여러분은 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나 자신이다. 그리고 내 인생이 가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여부를 결정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세상은 내가 높은 자존감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 않는다. 나보다 더 잘나 보이는 사람들이 득실대고, 종종 내게 상처가 되는 말들이 날아와 꽂힌다. 세상살이가 어찌 고단하던지, 슬프고 좌절스러운 일들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 아비규환 속에서 도대체 나는 어떻게, 내가 가진 이 소중한 자존감을 지켜나가야 한단 말인가?
기존 연구들에 따르면 높은 수준의 자존감은, 자기 가치의 하락을 막기 위한 보호 심리를 유발한다(Heatherton & Vohs, 2000; Tesser, 2000). 그리고 때로는 이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타인에 대한 공격성, 편견, 혹은 거부/회피 등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의도적 노력들이 수반되기도 한다.
이는 자존감에 대한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된 사실로, 한마디로 말해 자존감 지키려고 ‘오버하면’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들이 연출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사실 자존감 개념은 우리가 아는 것 이상의, 생각보다 복잡한 비밀을 감추고 있다.
심리학에는 자기 자비(Self-compassion)라는 개념이 있다(Neff, 2003a; 2003b).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慈悲)에 바탕을 둔 것으로, 자기 자비란 스스로에게 자비를 베풂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비란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없게 여기듯, 스스로를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행위다. 그리고 이 자기 자비는, 자존감이 가지고 있는 불안 요소에 대한 한 가지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자존감은 의식적, 의도적으로 추구되며 그 과정에서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 자비에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강조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놓음’이다. 자존감은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부정적 ‘평가’로부터 비롯되지만 자기 자비는 그 ‘평가’를 포기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상태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 자비 수준이 높은 개인들은 스스로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평가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담백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다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다. 그래서 누구나 다 서툴다.
자기 자비에서 중요하게 강조되는 요소 중 하나는 바로 보편적 인간성(Common humanity)이다. 우리는 고통, 불행, 실패 등은 인간의, 말 그대로 불가피한 경험임을 깨달아야 한다. 누구나 다 처음 살아 보는 인생이다. (당신이 윤회, 전생의 개념을 믿지 않는다면) 인생 2회 차를 살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다 서툴기 마련이다. 비록 서로에게는 웃는 척, 기쁜 척, 잘 나가는 척, 행복한 척하지만 사실 각자는 나름의 힘든 사정들을 다 가지고 있다. 자기 자비를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바로 이 ‘누구나 다 그러하다’라는 생각에 깊게 감응될 때, 타인에 대한 유대감이 깊어지고, 이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를 주고받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자존감 추구에 너무 몰두하지 말자. 위태롭게 애써 붙잡고 가야 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단지 ‘놓는 것’도 하나의 훌륭한 인생 지혜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왜 모든 일을 나서서 책임지려 하는가? 심지어 자존감이 낮은 것마저 ‘자기’ 탓으로만 돌릴 것인가? 일상의 사건 하나하나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려는 행위 역시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단지, 그럴 수도 있는 일일 뿐이다.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