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대선, 북핵 위기, 지진, 무엇, 그리고 또 무엇. 숨 돌릴 새 없이 사건사고가 일어났던 2017년도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날씨는 추워지고 길거리 곳곳에서 연말연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바야흐로 송년회 시즌이다.
지인들과 지난 1년을 돌아보고 서로를 위로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술과의 전쟁’ 시즌이기도 하다. 과음이 건강에 안 좋다는 말은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지만, 실천에는 여러 가지 걸림돌이 있다. 만연한 음주문화와 언제 어디서든 술을 구입할 수 있는 환경,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 등이 중요한 요인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최근 담배업계에서 아주 신선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담뱃갑에는 끔찍한 경고 그림을 넣으면서 소주병에는 예쁜 여자 연예인 사진을 넣게 해주는 것이 차별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담뱃갑에 연예인 얼굴을 그려 넣을 게 아니라, 이참에 소주병에도 음주 피해 경고 그림을 넣어서 차별을 시정해야 한다. 국내에서 음주로 인한 질병 부담은 담배와 막상막하 수준이다. 그중에서도 폭음은 심혈관질환이나 간암, 간경화 같은 만성적 건강문제뿐 아니라 급격한 건강상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
최근 독일 뮌헨 대학 브뤼너 교수와 시너 교수 연구팀이 <유럽 심장 학회지(European Heart Journal)>에 발표한 논문은 한국의 회식, 송년회 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폭음과 심장 부정맥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논문의 접근은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창의적이다. 연구진은 2015년 뮌헨에서 열린 옥토버페스트 행사 중 3028명의 자원자를 모집하고, 스마트폰으로 작동하는 심전도와 음주측정기를 나누어 주었다. 연구진은 이들에게서 측정한 심전도 결과와 알코올 농도를 이용하여, 단기간에 많은 양의 알코올을 섭취하는 것과 심장 부정맥의 관계를 분석했다. 특히 어떤 종류의 부정맥이 많이 발생하는지도 확인했다. 연구에 사용한 스마트폰 기반의 심전도 측정 도구인 얼라이브코르(AliveCor)의 신뢰도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지만, 연구 참여자 중 어떤 형태로든 부정맥을 일으킨 사람은 전체의 30.5%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종류의 부정맥이 같이 발병한 이도 5.4%나 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잘 알려진 ‘휴일 심장 증후군(Holiday Heart Syndrome)’과 연결된다. 건강하던 사람이 단기간에 많은 양의 술을 마신 후 갑자기 부정맥을 일으키는 이 증후군은 종종 치명적일 수 있다. 급사가 발생한다 해도 부검을 하지 않는 이상 사망 원인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기존 연구들은 급사의 90%가 부정맥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고했다.
그렇다면 폭음이 어떻게 부정맥으로 이어질까? 연구진은 단기간에 많은 술을 마시면 자율신경계에 이상을 초래하고, 그 결과 위험한 부정맥인 심방세동(Atrial fibrillation)이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카테콜아민 분비의 증가, 심박동수 변동의 감소, 관상동맥의 경련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갑작스런 폭음 후 발생하는 부정맥에 기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 급격한 폭음은 사고나 손상뿐 아니라 이렇게 부정맥을 일으켜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다.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만연한 폭음 문화 속에서 거절과 절제는 생각보다 어렵다. 특히나 교수가 주는 잔을 받아야 하는 대학원생, 상사가 주는 잔을 받아야 하는 부하 직원, 거래처 사장님을 잘 모셔야 하는 영업직 사원이라면 사양과 거절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권력형 음주 문화를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바야흐로 폭음 위험 시즌이 다가왔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다양한 ‘갑’들이 계신다면, 나의 음주 강권이 다른 이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겸양과 중도의 미덕을 발휘해주시길 바란다.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원문: 시민건강증진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