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정 로마 말기의 혼란은 일반적으로 기원전 109년 유구르타 전쟁으로 촉발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등장으로 시작되어 기원전 30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승리하여 제정으로 이행하면서 끝난 것으로 인식된다. 이 혼란은 공화정 로마 원로원에서 최고 권력자가 누가 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내전이라기보다는 이미 지중해를 ‘우리 바다(마레 노스트룸, Mare Nostrum)’라고 말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통치하게 된 공화정 로마가 앞으로 그 정체(政體)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내전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 내전에서 원로원파(옵티마테스, Optimates)는 로마는 앞으로도 계속 원로원이 최고 의사결정을 하는 기관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평민파(포퓰라리스, Popularis)는 이미 원로원이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기 때문에 제정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이쯤 되면 원로원파와 평민파라는 호칭 자체가 이상하지만, 이는 그냥 넘어가자). 피로 피를 씻는 내전이 종결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적 아버지인 카이사르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 인식에서 시작되는 정치 행위를 통해 옥타비아누스의 천재적인 정치적 능력이 드러난다. 일종의 국가 비상상황인 내전 상태였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부터 매년 집정관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내전을 위한 국가 비상대권을 위임받았다.
내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이 비상대권을 계속 보유하고 있으리라는, 그래서 이를 통해 원로원을 압박하리라는 원로원 의원들과 로마 인민들의 예상과는 달리 옥타비아누스는 이 특권을 기원전 27년 ‘내전 종식’을 이유로 로마 원로원과 인민에 반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전술한 것처럼 로마 원로원의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었고, 이에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을 가진 ‘아우구스투스(Augustus)’를 코그노멘(이름 뒤에 붙이는 존칭 혹은 별칭)으로 바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아우구스투스가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미 기원전 29년에 로마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공화정 로마의 제1시민’ 즉 ‘프린켑스(Princeps Civitatis)’ 칭호를 부여했다. 공화정 로마에서 이미 많은 원로원 의원에게 명예로운 호칭으로 부여된 프린켑스지만 이 호칭을 지닌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이 더해진 이상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공화정 로마 전통에서 범접할 수 없는 권위 둘(아우구스투스와 프린켑스)을 가진 이상, 그가 말하는 것은 평범한 원로원 의원이 말하는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사실이 둘 있다.
- 첫째는 내전기부터 내전이 종식된 이후에 이르기까지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군대의 임페라토르(Imperator), 즉 최고사령관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로마 군대를 지휘하고 통솔하는 임페리움(Imperium, 절대 지휘권)은 오로지 아우구스투스에게만 속해 있었다. 실질적 무력을 행사하는 집단을 하나의 수단으로 갖고 있는 이상, 그 사람이 갖는 명목상(De Jure) 권위와 실질적(De Facto) 권력은 옥타비아누스가 아무리 평범한 원로원 의원으로 보이려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 둘째는 이러한 군대를 운용할 수 있는 재정 수입원을 ‘황제 속주”라는 이름으로 보유한 것이다. 사실 내전이 종식된 후 속주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정치가 안정된 풍요로운 지역을 모두 원로원 속주로 하고, 제국 방어에 중요한 게르마니아, 판노니아, 모에시아, 아시아 등 변경지역을 황제 속주로 하고 제정일치 사회였던 이집트를 황제 직할령으로 만든다. 얼핏 보면 이집트를 제외한 비옥한 지역을 모두 원로원에게 주고, 군사적 충돌이 우려되는 지역을 황제 속주로 한 것은 제국을 위한 아우구스투스의 희생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바로 이 속주 분할로 인해 아우구스투스는 임페리움을 지속적으로 유지함은 물론이거니와 이집트에서 나오는 풍부한 세수를 군단 유지비로 사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즉 옥타비아누스는 역설적으로 내전이 종결된 이후에 아우구스투스와 프린켑스라는 권위와 임페라토르와 풍부한 재정 수입이라는 권력, 이 둘을 원로원의 자발적 의지로 보유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으로부터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는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됨으로 인해 파트리키 귀족이 된 아우구스투스는 평민만 취임할 수 있는 호민관이 될 수 없었다. 이에 원로원에서 호민관 특권을 부여한 것인데, 이 특권이 갖는 의미는 ‘신체에 대한 불가침 특권’과 ‘거부권(Veto)’이다.
즉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음으로 인해 아우구스투스는 신체의 안전을 적어도 법적으로는 보장받을 수 있었으며, 원로원 의결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거부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 현재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상임이사국이 갖는 특권이 바로 이 거부권임을 상기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큰 권한인지를 알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부여받은 개별 권한은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절대 공화정 로마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아우구스투스 같은 존칭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공화정 시기에도 이미 여러 차례 부여된 바 있으며, 프린켑스 역시 공화정 로마에서 원로원에서 가장 큰 권위를 갖는 사람에게 부여된 호칭이다. 임페라토르와 호민관 특권이 예외적인 경우이지만, 임페라토르는 국방에 신경을 쓰기 싫은 원로원이 아우구스투스에게 떠넘긴 것이고, 호민관 특권은 아우구스투스가 ‘명목상으로’ 원로원에 모든 권한을 돌려준 것에 대하여 원로원이 감사의 의미로 부여한 것이다.
이렇게 개별적으로 놓고 보면 군 통수권을 제외하면 그리 큰 권력이 아닌 것들이지만, 이것들이 합쳐지면 그 화학작용으로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최고 권력’이 탄생한다. 즉 아우구스투스는 28개 군단에 이르는 병력을 자신이 보유한 속주와 개인 영지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유지하는 최고 사령관인 동시에 로마 원로원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존엄한 자’이자 제1 시민, 그리고 거부권과 신체 불가침권을 가진 로마 인민의 대표자가 되었는데,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력을 통해 만들어진, ‘황제 아닌 황제’ 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심려원모와 인내심으로 이 특권들을 보유하고 제정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의해 확립된 제정의 문제점은 아우구스투스 정도의 만렙 정치인이 최고 권력자가 아닌 이상 언제든지 붕괴하고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동양이나 오리엔트에서의 왕 혹은 황제는 혈통에 의해 계승이 되고 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는 선거에 의해 계승이 되었다면, 로마 제정에서의 황제는 딱히 정해진 계승 방법이 없었다. 로마제국에서 황제는 옥좌나 혈통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정치력으로 부여받은 권한들의 종합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정 로마에서 황제가 갖는 일종의 ‘전략적 모호성’은 나중에 심각한 내전을 야기하는 원인이 된다. 대표적 예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시작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의 마지막 황제인 네로가 68년에 자살하자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를 거쳐 69년에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에 즉위할 때까지 만 2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기에 4명의 황제가 바뀌는 극심한 내전이다. 정치력이 부족한 칼리굴라나 네로 같은 후계자에게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놓은 정교한 체계는 오히려 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정 로마에서 황제 위에 수반되는 아슬아슬한 위기를 인식하지 못한 채 권력을 남용했고, 결국 그것이 암살과 그에 따르는 혼란으로 나타난 것이다.
원문: 미러클양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