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기술만으로 잘 먹고 잘살던 시대는 사라졌다. 디자인도 예외가 아니다. 몇 년 전만 해도 포토샵, 일러스트, 인디자인 등 어도비 계열의 복잡해 보이는 프로그램을 잘 활용하면 높은 연봉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제 그런 대우도 옛말이다. 다자인 툴은 다루기 쉬워졌고 대중의 디자인 식견은 다양하며 눈으로 보이는 표현 그 이상의 무언가, 새로운 표준이 필요하다.
어디까지가 기획이고 어디서부터 디자인일까
지난 2년 동안 100명이 넘는 디자이너, 개발자 그리고 기획자와 만나 커리어 관련 이야기를 나누며 도움 드렸다. 굳이 도움이 필요 없는 이들도 있었고, 스스로의 성장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분도 있었다. 함께 원하는 방향을 찾고 더욱 빠른 속도로 정확히 나아갈 수많은 방법 중 가장 합리적 선택을 하는 데 일조했다.
가장 많이 만난 부류는 디자이너와 기획자였고 그들의 실제 업무는 경계가 상당히 모호했다.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하는 이들은 과연 이렇게 계속 커리어를 쌓아도 될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 현장은 전문 디자이너, 전문 기획자가 아니라 두 가지 일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 산업 및 기업의 특수성에 따라 모두 다른 인재를 원했다.
기업에서는 비용 절감 및 업무 효과성을 위해 기획자형 디자이너 또는 디자이너형 기획자를 원하며 기획해서 즉각적으로 디자인 저작물의 가이드 또는 직접 만들어내는 등의 원스톱 처리를 선호한다. 실제 업무 현장에 ‘디자이너형 기획자’ 또는 ‘기획자형 디자이너’ 본의 아니게 두 역할을 같이 수행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디자이너 출신이지만 사정상 울며 겨자 먹기로 기획자 역할을 해야 했던 이들, 또는 기획에서 시작했지만 역할의 확장으로 디자인 업무를 보조하면서 기획과 디자인을 함께 하는 등 마치 자웅동체 같이 움직이는 업무 행태가 나타나고 있다. 마케터가 디자인적 감각이 없어 디자이너가 만들어야 할 콘텐츠 가이드를 줄 역량이 없다면 잘못된 작업 협조로 보이지 않는 비용이 발생한다. 반대로 마케팅적 감각이 없어 디자이너가 자신이 원하는 창작물만을 고집한다면 더 큰 비즈니스적 목적은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
일부 사업 기획을 제외하고 대부분 전술 단위의 마케팅, 브랜딩 홍보 등 대고객 커뮤니케이션 관련 직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작은 기업에서는 업무 효율을 높이고, 고객 및 클라이언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선택 중 하나로 어디까지나 이해관계자의 요구에 의한 변화이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디자인 업무의 중심 이동은 이미 시작됐다
실무 영역의 디자인을 그림 또는 표현 등의 일부 단어들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미 기획과 디자인의 경계를 만드는 것이 불필요해진 실무의 UI/UX는 마치 닥터 스트레인지의 도르마무 사냥과도 비슷하다. 매번 고객의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개선 그리고 또 개선이다. 단순히 예뻐 보이는 것으로는 과거와 같은 효과를 기대하지 못한다. 오히려 형편없어도 한눈에 들어온다면 그 디자인에 열광한다. 디자인의 겉이 아니라 속까지 함께 보고 느끼는 대중의 시선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디자인에 새로운 정의와 접근이 필요하게 되었다. 실무에서 기획과 디자인을 일부 통합한 개념으로 새롭게 접근하되 조직으로서 일하기 위한 규칙과 함께 궁극적으로 고객 제공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피드백 루프를 만드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고객을 향해 정교화되기 위한 것이라면 고객을 모르고서는 함부로 디자인할 수 없다.
디자인의 역할은 그대로다. 다만 이를 받아들이는 고객의 수준이 높아졌고 다변화했다. 예전에는 쳐다보지 않았던 저작물도 사람들이 열렬히 반응하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디자인이 변했다기보다는 이를 열렬히 받아들이는 이들이 변했다. 디자인에도 이제 맞춤형이 필수고 얼마나 고객을 이해하고 욕구를 반영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마케팅과 마찬가지로 디자인에도 이를 수용할 고객을 중심으로 한 디자인 기반 또는 철학이 중요하다. 고객에게 직·간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또는 콘텐츠를 명확한 아이덴티티나 콘셉트로 전달해야 한다. 만인의 행복을 위한 만인의 투쟁은 오히려 만인에 의해 무시되거나 사장될 뿐이다. 결국 고객을 위한 철학과 기반, 디자인 시스템을 올바르게 설계 및 운영 관리 할 수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원하는 디자인을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고객 중심 디자인의 철학이 선행되어야만 업무현장에서 디자인을 지속할 수 있다. 고객이 원하는 저작물(offerings)의 모든 것을 고객이 원하는 채널, 형태, 내용, 메시지 등으로 구성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고객에 의해 고객이 될 후보들에게 전달(Viral)해 준다. 디자이너의 목표는 디자인이 아니라 고객이 되어야 한다.
디자인적 사고는 모든 디자이너에게 필요하다. 생각에 집중해야 한다. 고객의 경험에 기초하여 그들의 불편함을 제거함과 동시에 감동을 이끌어내야 한다. 기본 골조는 기획자가 하더라도 관련 세밀한 부분을 다듬어 넣는 것은 디자이너의 몫이다.
생각의 흐름은 쓰기(Writing)-구상하기(Sketching)-그리기(Drawing)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가야 한다. 더욱 세밀하게 우리 제품과 서비스, 이를 이용할 고객에 대한 뚜렷한 정의를 통해 고객 페르소나를 개발해야 한다. 이를 실제 전달할 가치와 고객의 이해도 사이의 오해가 없도록 지속적으로 조정해갈 필요가 있다.
기업, 브랜드, 상품 및 서비스 등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의 형태는 다양하다. 다만 메시지의 변질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 윤리경영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취급하는 상품이나 서비스에 온갖 부정행위를 하고 있다면 아무리 화려한 아이템이라고 해도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없다. 넓게 보면 이와 같은 영역도 고객 경험의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다. 표현보다는 제공가치(VP)의 일관성을 위해 콘셉추얼 디자인이나 크리에이티브 디자인이 필요하다.
첫 번째 ‘쓰기’의 단계다. 고객 가치 네트워크상에서 온전히 해당 가치를 전달하려면 적절한 매체와 콘텐츠를 만들어 시기 및 상황별로 탄력성을 주면서 내보내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기업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소비재를 취급하는 기업만큼은 고객과 조직 모두가 바라는 가치 네트워크 내에서 철학적 기반에 의한 디자인 및 마케팅 체계를 통해 시장 속 실제 고객과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상품 및 서비스를 포함한 관련 콘텐츠, 저작물의 관리 및 통제가 가능해야 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구상하기’다. 정해진 콘셉추얼 디자인의 프로토타입이나 목업을 통해 실제 테스트에 나서야 한다. 상품이 담은 가치는 그 상품을 광고하는 콘텐츠에도 그대로 묻어나야 한다. 최근 SNS에서 상품의 본질적 가치보다는 무분별하게 단순 확산에 집중하는 잘못된 광고 콘텐츠를 본다. 전환 페이지에 고객을 이끌어 오기만 하고 뒤는 책임지지 않는 게 마치 길거리의 삐끼같다. 매출을 위해 만들었다고 보기 힘든 것투성이다. 모 브랜드가 N포털에서 광고를 철수한 것도 이와 정반대의 적절한 결정이라고 본다.
세 번째는 ‘그리기’다. 앞서 만든 스케치 버전의 콘텐츠를 완성한다. 한 번 만들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확실하게 정해진 고객, 콘셉트를 통해 이제부터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고객과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술래잡기를 해야 한다. 나 잡아봐라 하면서 멀찌감치 도망가기도 하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매우 고객 친화적으로 다가가기도 한다. 브랜딩과 광고, 홍보 사이를 오가면서 적절한 형태와 채널을 최대한 활용해 고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를 지속적으로 보낼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디자인을 잘하려는 사람들에게
물론 쉽지 않은 것은 잘 안다. 실제 업무 현장에 있는 이들, 특히 디자이너들은 편향적 사고에 젖어 있는지 모르는 답답한 상사들을 상대해야 하고 디자인이라고는 개미 눈물만큼도 모르는 광고주들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은 고객은 늘 정확하다는 것이다. 고객을 쫓는 우리가 정확하지 않아서 늘 문제가 발생한다.
디자인 씽킹은 고객 지향적 사고를 기반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고객을 위해 끊임없이 쓰고, 그리고, 채워 넣어야 한다. 만약 디자이너의 주관 또는 감에만 의존한다면 좋은 디자인이 나오기 어렵다. 그저 작품으로서만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업에서 봤던 몇몇 뛰어난 감각의 디자이너는 분명 무언가 달랐다. 그들은 디자인을 잘하기 위한 훌륭한 기획자이기도 했고, 그들의 디자인 철학이나 콘셉추얼한 접근 이전에는 늘 고객을 위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엇보다 고객을 위한 콘셉트를 만들어내는 디자인 사고와 디자인 실행력을 높이기 위한 표현력, 둘 모두를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
첫 번째, 디자이너는 글을 잘 써야 한다
디자인의 가치는 그 자체만으로도 설명과 설득이 이미 내재한 것이다. 직관적으로 보기만 해도 이해하고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핵심이다. 고객의 머릿속에 파고들어 간 상품과 서비스는 찰거머리처럼 고객에게 붙는다. ‘○○○○에는 □□□□’ 공식처럼 마케팅의 포지셔닝 또는 브랜딩의 개념과 유사하다. 고객의 마음을 이해하고, 끊임없이 디자인 콘셉트를 도출하고, 이를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콘텐츠의 형태 및 채널을 공부해야 한다.
두 번째, 디자이너는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
디자이너라는 직무를 포기한 이유 중 하나가 그림을 그리지 못해서다. 구조를 짜거나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에는 특화되었기 때문에 기획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디자이너는 머릿속의 형이상학적 개념을 형이하학적으로 표현하는 데 특화된 사람들이다. 모두가 쉽게 이해할 만한 무언가로 만들며 이를 끄집어내서 사람들에게 몸소 보여준다. 갖가지 디자인 도구를 통해 고객의 생각(이라 쓰고 내 생각이라고 읽는다)을 적절하게 표현해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스케치와 드로잉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될 것이다.
세 번째, 실현 가능한 것을 그려낼 줄 알아야 한다
디자인은 연구 직무와 유사하다. 모든 연구가 실제 제품화를 목표로 하는 것처럼 디자인도 마찬가지이다. 뚜렷한 목적이 있으며 조직이 정한 고객에게 온전히 다가가 원하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때 얼마나 비용 절감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굳이 겪지 않아도 되는 시행착오를 겪을 필요가 있을까. 늘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접근해야 한다.
네 번째, 디자이너는 탁월한 대인 민감도가 필요하다
대부분 업무가 그렇지만 디자인은 특히 협업이 중요하다. 많은 이와 함께 일을 해나가야 하며 디자인을 통해 기업이나 상품의 대표 격 역할을 수행한다. 고객을 직접 만나지 않아도 반응을 일부 디자인 저작물을 통해 쉽게 느끼고 알 수 있는 요즘 시대의 디자인은 고객 친화적이지 않으면 절대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함께 일하는 기획자 및 개발자를 설득하고 고객의 머릿속에 브랜드가 원하는 가치를 올바르게 형상화하고 전달하려 노력해야 한다.
마치며
디자인은 원래 논리다. 많은 이가 크리에이티브의 영역에 있다고는 하지만 무조건 크리에이티브한 것은 오히려 디자인보다는 아트의 경계가 아닐까 싶다. 물론 크리에이티브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받아들일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여야 한다. 디자인은 가장 창조적 산물이기도 하고, 고객에게 가장 가까운 이해하기 위한 저작물이기도 하다.
원문: Eden Kim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