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떤 글에서 원세훈을 ‘상상속의 유령과 싸우는 돈키호테’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석기사태로 그 표현이 틀렸음이 증명됐다. 내가 순진했고 어리석었다. ‘상상속의 유령’이 현실로 나타났으니 허공에 칼을 휘두른 돈키호테를 칭찬해야 하는 걸까?
원세훈의 눈에는 이석기뿐 아니라 반정부는 모두 종북세력
이석기사태로 종북세력(or그것과 가까운)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사실이지만, 원세훈의 몽상이 사실로 증명된 것은 아니다. 원세훈은 국정원장 재임시절 민주노총, 전교조 등의 시민단체와 박원순 서울시장, 최문순 강원지사 등의 정치인들, 명진 스님 등과 같은 종교인, 종교단체를 비롯해 4대강사업 등 정부시책에 반대하는 모든 국민들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기소한 검찰과 이나라의 재판부에까지 종북딱지를 붙였다. 이번에 드러난 ‘이석기류’의 존재는 원세훈의 망상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이석기의 혐의에 대한 입장과는 별개로, 이석기의 실체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대동소이하다. 이석기의 실체가 종북세력의 실존을 증명했다면, 이석기를 바라보는 사회일반의 시선은 -국민 절반이 종북이라는- 원세훈의 몽상이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다.
양비론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내가 둘을 같은 도마 위에 올려놓는 이유는 이 글이 두 사람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 아닌, 그들의 몽상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일란성 쌍둥이, 원세훈과 이석기
올해 전반기에 가장 핫한 이름이 원세훈이었다면, 후반기를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름은 단연 이석기다. <흑과 백>, <물과 불>일 것 같은 두 이름이지만 이들은 사실 매우 닮은 부류의 인간이다.
이석기는 2013년의 한국정부를 미제 괴뢰정부로 바라보았고, 원세훈은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을 종북세력으로 바라봤다. 모두 이성적 토론의 범주를 넘어서는 ‘몽상’이다. 한사람은 가상의 적을 무찌르기 위해 국정원에 댓글부대를 조직했고, 다른 한사람은 BB탄총 개조를 모의했다. 그 ‘실행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몽상 속의 적에게 칼을 뽑아든 돈키호테라는 점에서 둘은 같은 종류의 인간이다.
원세훈과 이석기는 ‘종류’는 물론 뿌리도 같다. 원세훈의 매카시즘과 이석기의 종북사상은 모두 분단이라는 비극을 먹고 자란 괴물이다. ‘본토’에서 조차 오래전에 사라진 매카시즘이 명맥을 이어온 것이나 북한이라는 비정상적인 국가체제를 추종하는 사상이 살아남은 것 모두 분단이라는 비정상적인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분단조국이 저들의 몽상에 면죄부를 주지는 못한다. 분단체제 아래서 산다고 해서 모두가 저런 멍청이가 되는건 아니기 때문이다.
분단이 낳은 괴물 원세훈-이석기는 분단체제 해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저들의 극단주의가 살아숨쉬는 한 한반도에서 화해, 포용같은 구호는 낭만일 뿐이다. 저런 지체아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분단체제의 극복은 요원하다.
법적인 잣대로 경중을 가린다면 이석기 쪽이 억울할 지도 모르겠다. 고작 BB탄총 개조 따위를 모의했던 이석기의 실력은 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부정선거를 진두지휘한 원세훈의 그것에 비할 바가 못된다. 허나, 몽상의 기괴함만을 놓고 본다면 이석기나 원세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이석기의 존재가 원세훈의 과대망상을 증명한다면, 원세훈의 존재는 이석기의 피해망상을 증명한다. 이석기가 없었다면 원세훈의 종북타령은 온전히 헛소리가 되었을 것이고, 원세훈이 없었다면 이석기가 보도연맹사건을 떠올리며 공포에 떨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를 혐오하면서도 각자의 존재이유를 증명하는 도구로써 공존해왔다.
성공한 지체아(遲滯兒)들
먼저 원세훈의 발언들을 보자.
외부의 적인 북한보다 오히려 더 다루기 힘든 문제가 국내 종북좌파들로서, 앞으로 더욱 정부 흔들기를 획책할 것이므로 더 이상 우리 땅에 발 붙이고 살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함. 종북세력 척결과 관련, 북한과 싸우는 것보다 민노총·전교조 등 국내 내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더욱 어려우므로… – 원세훈 원장 지시강조사항
북한과 종북 좌파가 대통령 국정수행 성과를 폄훼하고 정부 시책에 대한 반대 선동을 해왔다. 이런 공세에 대응해 사이버 활동을 벌이는 것은 국정원 심리전단의 고유 업무다 – 국정원 국정조사 청문회
(선거에서 지면)그땐 판사도 아마 적이 돼서 사법처리를 하지 않을 거야. 다 똑같은 놈들일 텐데… – 2010년 국가정보원 부서장 회의
다음은 이석기의 발언들이다.
전 세계 최강이라는 미 제국주의와 전면으로 붙어서 조선 민족의 자랑과 위엄과 존엄을 시험하는 전쟁에서 승리의 시대를 후대에게 주자. 우리가 싸우는 대상이 바로 북이 아니라 외래 침략자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주된 사상, 통일된 사상, 미국놈을 몰아내고 새로운 단계의 자주적 사회, 착취와 허위없는 그야 말로 조선민족의 시대의 꿈을 만들 수 있다.
수 많은 곡절을 딛고 우리가 동지부대를 이루고 그야말고 미국놈들하고 붙는 대민족사의 결전기에서 우리 동지부대가 선두에서 저놈들의 모략책동을 분쇄하고… -이석기 5.12 RO모임. 한국일보 보도 인용
양 극단을 달리는 두 사람의 세계관이지만, 그것들에서 읽혀지는 정서는 매우 유사하다. 두 사람의 발언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정서는 비장함과 투쟁심, 호전성과 영웅심 같은 것들이다. 둘의 인생은 현대판 돈키호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그들이 믿고 혐오했던 가상의 적의 존재는 둘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었다.
원세훈은 종북세력 척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고, 이석기는 남한사회의 자주성회복(?)에 사활을 걸었다. 그들의 인생에서 ‘종북척결’과 ‘미제타도’라는 구호를 들어내고 나면 먼지만 남는다.
“미국놈들하고 붙는 대민족사의 결전기에서 우리 동지부대가 선두에서 저놈들의 모략책동을 분쇄하고…” -이석기-
“심리전단이 보고한 ‘젊은층 우군화 심리전 강화방안’은 내용 자체가 바로 우리 원이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원세훈-
저들은 1940년대에나 쓰였을 법한 언어로 자신들의 몽상을 표현하고 있다. ‘대민족사의 결전기’, ‘젊은층 우군화 심리전 강화방안’이라니, 요즘 누가 저런 말들을 쓸까 싶을 정도로 저들의 언어는 낡고 구리다. 저들의 머리 속은 사방천지에 공산주의자들이 들끓고 남한정부를 친미 꼭두각시들이 장악했던 70년전 남한사회에 머물러 있다. 이런 지체아들이 득세하는 나라가 정상일리 없다.
“통일혁명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면서 선두의 역할을 한다면 이 또한 명예가 아닌가” -이석기-
“인터넷이 종북좌파 텃밭이 됐다. 오염된 국민의 생각을 국정원 사이버로 정화해야 한다” -원세훈-
풍차를 괴물이라 믿은 돈키호테, 이석기와 원세훈
재미있다. 소설 속 돈키호테 역시 스스로를 정의감에 불타는 영웅으로 생각했다. 종북세력으로부터 국가를 구하고자 했던 원세훈의 정의감이나, 미제의 폭압으로부터 나라를 구해야한다는 이석기의 정의감 역시 돈키호테의 그것에 못지않다. 돈키호테의 정의감은 그저 유쾌한 조롱거리로 그쳤지만, 원-이의 삐뚤어진 정의감은 이나라에 큰 혼란을 몰고 왔다.
원세훈과 이석기는 한국정치의 비정상성을 상징하는 극단의 괴물들이다. 비슷한 시기에 저들 중 한명은 이나라 정보기관의 수장이 되었고, 다른 한명은 당당히 국회에 진출했다. 두 몽상가들의 출세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깊은 수렁에 빠뜨렸다. 걸출한 몽상가들의 ‘재능’이 예술의 영역이 아닌, 정치의 영역에서 쓰여졌다는 것은 비극이다. 이석기-원세훈 같은 몽상가들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돈키호테들이 쥐락펴락하는 나라는 미친나라다. 돈키호테가 요즘시대에 태어났다면 그가 가야할 곳은 오직 정신병원 뿐이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정상적인 세상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