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 주연의 <내부자들>은 지금도 종종 회자되는 영화입니다.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대한민국 권력의 추악한 모습들이 비슷한 주제를 담은 영화에 대한 관심과 공감을 이끌어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이병헌(안상수 역)과 조승우(우장훈 검사 역)가 부조리한 권력의 내부자가 되어 충격적인 비리를 폭로하는 장면은 보는 이의 가슴을 통쾌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조직의 비리를 폭로하며 정의를 바로잡고자 하는 내부자들의 시도는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항상 있어왔습니다. 내부자들이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위협을 무릅쓰고 몰래 녹음하고 촬영하는 것도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가 정말 그들이 기대한 정의를 가져왔는지, 그리고 그들은 용기만큼의 보상이나 보호를 받았는지는 항상 의문으로 남는 것도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화만큼 긴박하고 한편으로 씁쓸한 현실의 내부자들, 지금부터 역사상 최대규모의 비리를 폭로했던 내부자들의 사례를 함께 살펴보며 그들이 짊어졌던 정의의 무게를 느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크 휘테커. 역사상 최대규모의 비리를 폭로한 내부자로 평가받는 그는 1992년 당시 미국 최대 규모의 농산물 가공업체인 Archer Daniels Midland (ADM)의 최고위 임원중 한명이었습니다. 마크는 영화 속 이병헌과 비교해도 평범한 내부자가 아니었습니다.
연매출 30조원의 세계최대 농산물 가공업체의 최고위임원, 매년 20억원의 연봉, 코넬대학교 생물화학 박사 등 최상위 계층의 부와 명예를 모두 누리던 마크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내부자가 될 만한 이유가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의 설득과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ADM의 엄청난 비리를 미연방수사국 (FBI)에 실토하게 됩니다. 그 비리는 바로 ADM이 제품의 가격을 다른 경쟁업체들과 수년간 비밀리에 담합하면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가격담합(Price cartel)은 시장경제 체제의 국가에서 엄격하게 규제하는 범죄행위입니다. 상품의 가격은 생산자들 간의 공정한 경쟁을 통해 조정되어야 하는데, 기업들이 서로 협정을 맺어 가격을 일률적으로 통제할 경우 소비자는 막대한 손해를 받고 기업은 부당한 이익을 얻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가격담합을 기업의 중대범죄로 인식하고 적발될 경우 수백억 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등 매우 엄격하게 처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격담합은 실제로 적발하기가 매우 어려워 처벌받는 사례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를 적발하기 위해서는 기업들이 가격을 합의하고 서로 생산량을 정했다는 증거가 필요한데, 이 담합과정이 기업의 최고위층끼리 아주 은밀하게 이루어지다 보니 증거를 확보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설사 가격담합을 했다는 자백을 한 명에게서 확보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담합에 가담한 모든 사람의 공통된 자백 없이는 담합이라고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FBI는 단 한 번도 수사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마크가 털어놓은 ADM의 가격담합범죄 규모는 FBI를 충격에 빠뜨릴 만큼 어마어마했습니다. 동물사료첨가제인 라이신의 가격을 높이기 위해 미국, 일본, 한국의 주요 라이신 생산업체들이 모두 담합에 참여했습니다. 미국의 ADM, 일본의 아지노모토, 교와하꼬, 그리고 한국의 미원, 제일제당은 1990년대 중반부터 가격을 담합하기 시작하여 9개월 만에 라이신 가격을 70% 인상시키고 매년 수백억 불의 부당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각 회사의 최고위 임원들은 미국 사법기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매년 홍콩, 파리, 도쿄 등의 호텔에서 비밀리에 만나 가격을 정하고 그 증거를 삭제해왔습니다.
그 담합의 핵심 당사자가 털어놓은 충격적 국제범죄의 실상을 마주한 FBI. FBI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가격담합범죄 수사를 이번에는 성공하겠다는 다짐으로 미법무부와 함께 3년간의 장기수사에 착수합니다. 그리고 이 수사의 핵심에는 FBI 역사상 가장 고위직급의 내부고발자인 마크가 있었습니다.
마크는 1992년 11월부터 FBI의 지시에 따라 가격담합에 가담한 핵심임원들과의 대화를 녹음하고 FBI에 전달했습니다. 마크는 FBI가 제공한 녹음기가 숨겨진 서류가방을 들고 임원들의 방에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가격담합을 인정하는 대화를 녹음하기 위한 마크의 시도는 꽤나 대범하고 아슬아슬했습니다.
“테리, 지난번 아지모토사와 합의한 가격은 잘 지켜지고 있는 거지?”
“이번 가격담합은 참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아.”
처럼 마크는 누가 봐도 어색하게 억지로 가격담합의 주제로 대화를 이끌고자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크는 명목상 비밀정보원일 뿐 수개월간 훈련을 받는 FBI의 비밀요원이 아니라 이런 첩보 활동이 어색한 일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크의 어설픔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그는 ADM의 모든 핵심임원들로부터 가격담합을 인정하는 대화를 녹음하 는데 성공합니다. ADM의 회장인 마이클 안드레아스(Michael Andreas), 사장 제임스 렌달(James Randall)를 포함해 핵심임원들은 그들의 대화가 녹음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가격담합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마크는 이렇게 녹음한 테이프들을 비밀접선 장소인 홀리데이인 호텔 방에서 FBI에 전달했습니다
이렇게 ADM의 핵심인원들의 진술이 담긴 녹음테이프가 확보됬음에도 불구하고 FBI는 그들을 기소할 수 없었습니다. 가격담합이라는 범죄의 특성상, 담합에 상대방인 경쟁회사들의 공통된 자백 없이는 증거불충분으로 기소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소를 위해서는 ADM과 경쟁사가 한자리에서 담합을 하는 현장의 대화를 녹음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FBI는 이 담합의 현장을 알아낼 수도 녹음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이는 오직 마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크는 약 8개월간 도쿄, 파리, 밴쿠버 등에서 경쟁사와의 은밀한 미팅을 서류가방에 숨긴 녹음기로 모두 녹음했습니다. FBI는 그의 비밀 정보활동을 위해 자켓에 숨길 수 있는 최신형 녹음기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마크는 스스로를 제임스 본드 007보다 두 배 똑똑한 014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비밀정보원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FBI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1년 동안 녹음한 수십여개의 테이프들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회사의 최고 책임자인 마이클 안드레아스 회장과 경쟁사의 최고경영자가 직접 담합을 합의하는 현장의 증거를 확보하고자 하는 욕심이었습니다. 이 증거가 없다면 기소되더라도 결국 실무자들만 처벌될 뿐 핵심임원들은 비싼 변호사들의 노력으로 처벌을 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993년 10월 25일. 드디어 기다리던 결정적인 증거를 잡을 기회가 왔습니다. 마크의 오랜 노력으로 ADM회장 마이클 안드레아스와 일본 아지노모토 사의 야마다 사장이 직접 미국 땅에서 대면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얼바인의 메리어트 호텔 방에서 이루어진 이 미팅에서 양사의 두 최고 경영자는 내년도 세계 라이신 시장성장율을 공유하고 누가 얼마만큼을 나눠 가질 것인가에 대해 줄다리기 협상을 했습니다. 양사의 최고 경영자들은 직접 펜을 들고 벽에다 숫자를 써가며 보다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기 위해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룸서비스로 점심식사를 시켜가며 진행된 세 시간의 미팅에서 양사는 내년에 서로 4천 톤의 라이신을 추가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서로 비밀리에 생산량을 나누었습니다. 양사가 생산량을 서로 합의하고 가격을 조정하는 완벽한 가격담합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FBI가 방에 몰래 설치한 비디오카메라와 마크의 서류가방 속 녹음기에 그대로 담겼습니다.
완벽한 증거와 함께 이제 국제 범죄자들을 기소할 준비가 끝난 듯했습니다. 하지만 미연방검사는 다시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기소를 미루었습니다. 그 이유는 황당했습니다. 첫째, 양사의 최고경양자들이 미팅 내용에 대해 서로 ‘합의 (agreement)’라고 콕 집어서 말하지 않았으며 둘째, 가격담합에 가담하는 나머지 세 개 업체가 미팅에 빠져있다는 것이었습니다. FBI는 그들이 합의한 생산량 숫자가 적혀진 종이를 들이밀며 반발했지만, 미연방검사는 모든 가담자들이 ‘합의한다’라는 말을 직접 하지 않는 이상 증거로 볼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낙담한 FBI는 다시 마크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격담합에 가담하는 5개 업체의 최고경영자가 모두 미국 땅에서 모여 가격담합에 “합의”한다고 말하는 결정적인 증거, 이 황당하리만큼 불가능한 증거를 과연 마크가 다시 한번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1994년 3월 어느 날 아침, 하와이 호놀룰루의 쉐라톤 마카하 리조트에는 세계 대표 곡물가공업체의 최고경영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ADM의 테리 윌슨 부사장, 아지노모토 사의 야마다 대표, 교와하꼬의 마사루 대표, 미원 미주지사의 김OO 사장, 제일제당의 서OO 전무가 5개의 회사를 각각 대표하여 이곳 하와이에서의 비밀미팅에 참석하였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이 미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역시 마크였습니다. 마크는 주저하는 각 회사의 대표들에게 하와이의 아름다운 골프장을 설명하며 설명하며 유혹했고, 결국 5개 회사의 대표자들을 이곳 하와이에 모이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FBI가 전날 카메라와 녹음기를 설치한 방에서 이들은 내년도 라이신 생산량과 각 회사별 할당량을 논의했습니다. FBI의 녹음테이프에 담긴 이들의 대화는 이들이 가격담합을 통해 부당이익을 챙기려는 의도를 명확하게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친구이지만 고객은 적입니다. 우리가 협력하면 돈을 벌지만 고객은 우리 물건을 싸게 사려고만 합니다.
우리는 서로 더 믿고 협력해야 합니다.”
모든 미팅이 끝나갈 무렵, 마크는 5개 회사의 대표들에게 합의한 내용을 요약해서 상기시키며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참가자 한 명한 명에게 물었습니다,
“이 합의된 가격과 생산량에 합의(agree)하십니까?”
1995년 6월 27일, 70여 명의 FBI 수사관들이 ADM의 본사를 압수수색하면서 국제가격담합 범죄는 드디어 3년간의 비밀수사 끝에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3년간 마크를 통해 수집된 증거물들은 범죄사실을 입증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ADM의 최고위 임원들은 결국 재판을 포기하고 범죄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ADM은 가격담합 범죄에 대한 벌금으로 미국 정부로부터 사상 최고금액인 1억5백만 불의 벌금을 부과받았고 캐나다, 멕시코, 유럽 정부로부터 5천억 불의 벌금을 부과받았습니다. 고객사들은 1억 불 규모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주주들은 3천8백만 불 규모의 배상을 청구하였습니다. 최고경영자 마이클 안드레아스를 포함한 3명의 최고 임원들은 3년의 징역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4개 업체는 유죄를 인정하고 수사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처벌은 감량 받았으며, 역시 고객사와 주주들로부터 거액의 소송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FBI와 미사법당국은 이번 성공사례를 바탕으로 가격담합 수사를 제지, 비타민 등의 다른 업종에도 확대하여 유사한 가격담합 범죄를 적발하고 기소하는 성과를 이뤄내게 됩니다. 이 모든 성과는 마크라는 내부자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가 있었기에 국제적인 가격담합 범죄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고 그가 3년간 수집한 증거물을 바탕으로 범죄자들을 법정에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 공을 세운 마크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ADM에 대한 재판이 한창이던 1995년 10월, 마크는 자신의 집 차고 안에서 자살을 시도합니다. ADM에 대한 압수수색 이후 마크가 내부자임이 드러나자 ADM은 즉각 그를 대기발령 시키고 그의 약점을 찾기 위한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가 ADM에서 재직한 7년간의 모든 행적과 문서들을 분석하고 그의 비리를 찾아내기 위해 그와 가깝게 지냈던 동료직원들을 협박하였습니다.
결국 ADM은 마크를 거래업체들로부터 뒷돈을 받아 횡령한 혐의로 고발하고 즉각 해고하였습니다. 마크는 거래업체로부터 받은 뒷돈에 대해 ADM이 고위임원들에게 세금을 회피하여 보너스를 지급하는 관행이었다고 항변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마크는 가격담합에 가담한 범죄자로 재판을 받게 되어 본인이 고발한 사건에 대해 본인이 처벌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자살시도는 실패했지만 그는 결국 재판을 통해 가격담합과 횡령에 대한 처벌로 10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는 가격담합을 주도한 ADM의 세 명의 임원들보다 3배 이상 오랜 기간의 징역형이었습니다.
마크에 대한 법원의 결정이 알려지자 미국 내 많은 지식인들은 분노했습니다. 수사를 진행했던 FBI 요원들부터 전 법무부 장관, 국회의원 등 많은 사람들이 마크에 대한 처벌이 불공정하다며 재심을 요청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일부에서는 미 법무부와 검사들이 ADM의 정치적 영향력에 의해 예속되었으며 ADM이 마크가 수집한 증거물들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이들을 매수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실제로 마크가 기소되었던 횡령혐의에 대해 이를 반박하는 주장들도 내부에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크의 말대로 ADM에서는 회장 마이클 안드레아스의 묵인하에 거래업체로부터 뒷돈을 받는 것을 고위직 임원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방법으로 사용해 왔다는 내부 진술들이 나왔으며, 다른 임원들도 이런 방식으로 불법 보너스를 오랫동안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마이클 안드레아스 회장은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마크가 뒷돈을 받고 있다는 것을 수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실토하면서, ADM이 마크에게 보복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과 여론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크는 법원의 판결대로 1998년 4월에 수감되었습니다. 그의 수감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구명하기 위한 노력을 펼쳤지만 이상하리만큼 그 노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여러 지도자들이 부시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에게 그를 사면할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지만, 마지막 최종 결정단계에서 매번 사면 요청은 기각되었습니다. 그리고 2006년 12월에 모범수로 8년 6개월의 형을 마치고 석방되었습니다.
마크의 사례는 내부고발자를 사회가 제도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당연하지만 잘 이루어지지 못한 주장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합니다. 내부고발자가 보호받지 못한다면 조직의 내부비리를 밝혀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정의를 우선하는 문화를 갖추어 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개인은 언제나 조직 앞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조직은 개인에게 보복할 수 있는 정보와 자원의 힘을 갖고 있고, 조직의 비리를 드러내는 개인은 그 보복의 타겟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조직에서 최고위 위치와 FBI의 보호를 받고 있던 마크조차도, ADM이 갖고 있던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힘 앞에서 희생당하는 사례를 보면 과연 누가 내부고발자로 안전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제도적인 장치의 필요성. 저는 이 당연한 명제에 더불어 마크의 사례가 우리들에게 하나 더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우리는 내부고발자에게 얼마나 많은 순수성을 요구하고 있는가?”입니다.
마크는 미국의 경제정의를 바로잡는데 큰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많은 지식인들이 그를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ADM의 보복에서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반 대중의 마크에 대한 싸늘한 시선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마크 또한 가격담합범죄의 가담자였을 뿐 아니라 횡령이라는 범죄를 저지를 범죄자였습니다. 아무리 그가 중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횡령이 그가 속한 조직에서 당연시되는 일이었다 하더라도 일반 대중들의 눈에 마크는 정의를 주장할 자격이 되지 못했습니다. 즉, 일반 대중들에게 마크는 감히 정의를 말할 수 있을 만큼, 내부고발자가 될 수 있을 만큼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ADM은 이러한 일반 대중의 내부고발자에 대한 높은 기대수준을 잘 이용했습니다. 사람들은 마크가 고발하고자 하는 가격담합범죄의 심각성보다는 마크라는 사람의 불순함에 더 관심을 가졌고, 결국 ADM의 범죄자들은 고작 3년 징역형만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영화 내부자들의 내용에서 바로 이러한 마크의 사례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병헌(안상구 역)이 미래 자동차의 비자금과 백윤식 (이강희 역)의 비리를 폭로했지만, 결국 감옥에 간 건 이병헌이었습니다. 백윤식은 언론을 통해 이병헌이 폭력배였음을 강조하고 그의 내부고발자로서의 순수성을 공격했습니다. 정치-경제-언론의 추악한 유착이 비자금 문서를 통해 폭로되었지만, 그 폭로를 한 이병헌은 대중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폭로 내용은 묻혀졌습니다. 백윤식의 영화 중 대사처럼 유력 기업인과 정치인 그리고 언론인의 명예를 실추시키기에 이병헌은 한낮 조폭일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내부고발자들에게 기대하는 순수 무결함이라는 자격. 저는 그 기대가 너무나 허황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마크가 가격담합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면, 이병헌이 백윤식의 하수인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 둘은 폭로를 할 수 있었을까요? 범죄에 가담한 사람만이 그 범죄를 폭로할 만한 충분한 증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단순히 정황이 아닌 증거를 가지려면 내부고발자는 필연적으로 범죄의 내부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내부고발자들에 대해 갖고 있는 너무나도 높은 도덕적 기대를 낮추지 않는다면, 사회의 부조리함은 쉽사리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부조리한 조직은 대중의 이 높은 기대를 잘 알고 이를 이용하여 내부고발자들을 매장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가 어느 정도의 보호와 대가를 제공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합니다. 내부고발자에게 고발의 대가로 수억의 보상금을 준다면 이는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의 보상일 테니까요. 하지만, 내부고발자가 내부자로서 저질렀던 범죄에 대한 사면 그리고 신변보장은 고려해보아야 할 수준의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내부고발자가 저질렀던 범죄를 덮어주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라 하기 힘들지만, 이는 부조리함을 세상에 드러내고 더 큰 정의를 세울 수 있는 촉진제가 될 것입니다. 개인이 정의롭기 위해서는 조직의 힘 앞에 그리고 스스로의 과거 앞에 어쩔수 없이 대가를 치룰 수 밖에 없습니다.
삼성의 불법 비자금을 폭로했던 김용철 전 삼성법무팀장은 자신이 그 범죄의 일원이었음을 인정하며 “나도 공범이다. 깊이 뉘우친다. 그리고 구속될 각오가 되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의롭고자 하는 개인의 대가를 줄여주고자 하는 것이 사회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들이 부조리한 조직의 계략에 휘둘리지 않고 내부고발자가 말하는 내용에 집중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해지는 것입니다. 백윤식의 말처럼 대중이 개, 돼지가 되지 않으려면 이병헌이 과거 폭력배였더라도 그가 폭로하는 내용에 더욱 귀 기울여야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의를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깨끗한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정의를 말하는 데에는 자격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는 그 용기를 보호하고 대가를 덜어주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너는 얼마나 깨끗한가 보자”가 아니라 폭력배였던 이병헌도 가격담합 범죄자였던 마크도 언제든지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와 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원문: 세상을 풀어보는 두루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