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파로 가득한 거리를 혼자 가로지른다. 누구를 만나지도 인사를 나누지도 않는다. 그의 발길이 멈추는 곳은 오로지 편의점. 오늘도 그는 새로 나온 음료수를 마신다. 이웃집 남자는 어깨를 치며 외친다. “스토커 스토커다!”
잠깐, 나는 스토커가 아니라 음료수 신상털이 마시즘이라고.
이웃집 남자와 스토커 음료수
이것은 전대미문의 스토커 사건이다. 스토킹할 사람이 따로 있지 이웃집 남자를 하다니.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재능 낭비가 있다. 오해가 풀리고 나가려는 나에게 남자는 말한다. “제발 스토커를 막아주시면 안 될까요? 저기 음료수 코너에 있어요.” 아휴 귀찮은 유명세.
나는 스토커를 발견했고 한 가지를 깨달았다. 마시즘을 쓰는 사람도 그렇지만, 보는 사람 역시 평범한… 아니 그 비슷한 범주의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평화로운 동네 편의점에 스토커가 나타났다
편의점에 방문할 때마다 이름을 부르는 스토커라. 빙그레 ‘닥터캡슐’이 스토킹 하는 인물은 민석씨 뿐만이 아니었다. 상돈씨와 준기씨는 물론 나래씨, 윤지씨, 수민씨까지 성별을 가리지 않는 잔혹함을 보였다.
나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동네 편의점에 있는 닥터캡슐을 모두 검거했다. 물론 매장 안에 숨어있는 재고까지 털어내었다. 그래서 한 병에 얼마죠? (네 1,500원 입니다) 초등학교 때 곱하기를 잘 배웠다면 이런 소비는 안 했을 텐데.
닥터들 모두 진실의 방으로
문제가 생겼다. 사도 너무 많이 샀다. 테이블을 가득 채운 닥터캡슐들은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피해자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눈으로 봐도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자, 한 명씩 진실의 방으로!
스토ㅋ… 아니 닥터캡슐은 1997년에 나온 제법 역사를 자랑하는 발효유다. 요플레 하면 떠오르는 플레인 맛과 포도의 분위기를 담은 아로니아 맛으로 나뉜 평범하지만, 괜찮은 음료다.
아니 선량하다고 생각한 음료가 이런 짓을! 나는 참지 못하고 보이는 족족 닥터캡슐을 마셨다.
살아서 장까지… 닥터의 꿈
특별한 맛은 아니다. 하지만 질척이는 식감이 독특하다. 입구만 더 넓었으면 숟가락으로 떠먹어도 좋을 정도다. 하지만 이 끈적함 속에 혓바닥 위를 동글동글 굴러가는 것들이 있다. 바로 닥터의 자랑, 캡슐이다.
장내 소화를 도와준다는 유산균. 이전까지는 유산균들은 장에 도달하기는커녕 위산에 녹아버리기 일쑤였다. 닥터캡슐은 유산균을 동그란 캡슐에 실어 장까지 전송을 하는 걸로 ‘닥터’라는 학위를 받았다. 뜰채에 받아서 세어보니 한 병에 무려 167개의 캡슐이 들어있다.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해 미쳐버린 음료여
문제는 이것이다. 닥터캡슐이 가진 효능은 엄청나지만 세상이 알아주지 않았다는 것.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이 미치광이 박사(는 아닙니다)는 지나가는 사람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스토킹 하게 된 것이다. 닥터다운 방법으로.
그는 빅데이터를 사용했다. ‘세상 물정의 물리학’이라는 책에서는 연대별로 자주 불려지는 이름이 있다는 연구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렇게 그는 연대별, 성별 많이 있는 이름들을 수백 개를 추출했다. 그런데 내 이름은?
이 많은 닥터캡슐을 즐겁게 마시는 방법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문제는 남았다. 이걸 어떻게 다 마시지? 분명 나처럼 이름 고르는 재미에 감당하지 못할 만큼 닥터캡슐을 많이 산 사람이 있을 것이다(없다). 만약 상사 이름의 닥터캡슐을 구했다면 자연스럽게 야자타임을 시전 할 수 있다. 닥터캡슐도 줄이고, 스트레스도 날리는 방법이다.
그래도 너무 많이 샀다? 그렇다면 빙고게임을 할 수 있다. 친구와 닥터캡슐을 25개를 모아 이름을 불러 번갈아 마시는 것이다. 빙고를 하려면 25병을 사야 한다. 1,500원 곱하기 25는 무엇일까? 바로 ‘안 산다’다. 그래도 나는 사고 말았다. 친구는 없어서 혼자 외로운 빙고를 했지만.
음료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평범한 음료수가 내 이름을 불러주자 새로운 음료수가 되었다. 닥터캡슐 스토커 사건은 포장이 바뀌더라도 음료수가 주는 느낌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을 것이다. 마치 ‘그가 내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그는 평범한 음료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시구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