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의 대가 맨큐의 수업을 거부한 하버드의 학생들
<맨큐의 경제학>이라는 책이 있다. 97년 출간되어 세계적으로 100만부 이상 판매된 이 책은 10여년 째 보수주의 경제학의 바이블로 읽혀지고 있다. 2011년 11월 2일, 이 책의 저자 그레고리 맨큐의 강의실에서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맨큐 교수의 ‘경제학 10’강의가 시작되자 갑자기 70여명의 학생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강의실에 남기고간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오늘 우리는 당신의 경제학 입문 수업의 깊은 편향성에 불만을 표하고자 수업에 출석하지 않겠다. 우리는 당신의 성향이 학생, 대학 나아가 더 넓은 사회에 끼칠 영향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한다.
편향된 당신의 강의 ‘경제학 10’은 미국의 경제적 불평등을 상징하며 이것을 확대시키고 있다. 때문에 기초 경제이론의 부족한 토론에 반대하며 당신의 수업에서 나와 미국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을 이야기하는 미국의 변화를 지지하러 갈 것이다. 우리의 이런 우려와 항의를 깊이 숙고해 주기를 바란다.” -‘경제학 10’을 우려하는 학생들이-
강의실을 빠져나온 학생들은 ‘기득권에 편승하지 말자’, ‘월가 시위대와 연대하자’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월가 점령 시위에 참가했다.
국정원에 신고당한 마르크스주의 강사, 맨큐를 CIA에 신고했다면?
몇일 전 한국에서도 그와 비슷한(?)일이 있었다.
경희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 등을 강의하는 임승수(38) 씨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학교관계자로부터 한 학생이 국정원에 자신을 고발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다. 임씨를 신고한 학생은 그가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반미사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민주노동당에서 간부로 일한 전력도 문제삼았다. 고발당한 임씨는 “주위에 최근 나처럼 신고당한 강의자가 또 있다. 학생이 저를 국정원에 신고했다는 사실보다 그 학생이 신고한 사실을 학교에 떳떳하게 알리는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군사부일체’ 따위의 고루한 훈계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강의를 선택하고 거부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주어진 권리다. 맨큐를 거부한 하버드 학생들과 ‘자본론’을 배우길 거부한 경희대 학생, 자신들에게 불편한 강의를 능동적으로 거부했다는 점에서 둘의 행동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둘의 행위에서 느껴지는 감흥은 무척이나 다르다. 강의실에서 나온 하버드 학생들은 월가 점령 시위에 참가했고, 경희대 학생은 국정원에 고발장을 접수했다. 이 차이는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 걸까?
<맨큐의 경제학>과 마르크스의 <자본론>, 각각 보수주의 경제학과 사회주의 경제학의 정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두 책은 서로의 대척점에 있다.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 롬니 대선 예비 후보 캠프에서 일했던 맨큐의 경제학의 저자 그레고리 맨큐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대부로 통하는 인물이다. 자본론의 저자 칼 마르크스는 잘 알려진 대로 20세기를 뒤흔든 사회주의 경제학의 창시자다.
하버드 학생들은 맨큐의 강의가 세계경제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걱정했고, 경희대 학생은 임씨의 자본론 강의가 한국사회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걱정했다. 두 걱정의 당위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그들이 택한 걱정의 ‘방식’이다.
만약 하버드 학생들이 맨큐 교수를 CIA에 고발했다면 어땠을까? 미국에서는, 아니 보통의 민주국가에서는 불가능한 이런 일이 한국에서는 가능하다. 맨큐의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반대하는 것은 학문적 견해차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런데 미국에서 맨큐는 저항과 논쟁의 대상이었지만, 한국에서 자본론은 고발의 대상이다. 물론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은 한국의 실정법 국가보안법이다.
대학가에도 잔존하고 있는 메카시즘
경희대 학생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임씨를 고발한 근거는 세 가지다. 임씨가 1. 자본론을 강의한다는 것과 2. 반미사상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3. 민주노동당의 간부로 일했다는 경력이다. 문제의 <자본론>은 어떻게 한국에서 버젓이 판매되고 있는 것일까?
1988년 <이론과 실천사>가 자본론을 번역-출간하자 검찰은 출판사 사장(김태경)을 이적표현물 간행 혐의로 구속수사했다. 그런데, 당시의 검찰은 김씨를 기소하지도 못한 채 풀어줘야 했다. 공안검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책을 뒤졌으나 자본론 어디에서도 이적표현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한국에서도(지구의 어떤 나라에서도) 자본론은 금서가 아니다.
나는 임씨가 어떤 내용의 강의를 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한국의 보수사회에서 통용되는 ‘반미사상’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폭력적인 팍스아메리카나에 반대하는 담론을 뜻한다. 이를 ‘반미’라는 불친절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도 문제지만, 설사 임씨가 특정국가에 대한 호불호를 갖고 있다한들 그것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합법적인 원내정당에서 당직자로 근무했던 경력을 문제삼은 대목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결국, 임씨가 국정원에 의해 기소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제로(0)다. 학생은 무고(誣告)를 한 것이다.
이번 해프닝은 박물관에나 전시돼있어야 할 매카시즘이 대학가에도 잔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학생의 어리석은 치기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국정원장이 국민의 절반을 종북세력이라 규정하고 여당의원이 공공연하게 ‘좌파와의 전쟁’을 외치는 나라에서 저 학생의 ‘도발’은 차라리 귀여운 수준이다.
진짜 비극은 이 학생의 행위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이나라의 현실에 있다. 학생의 고발은 헛발질이었지만, 자론본 강의를 듣고 국가보안법에 따른 반역을 의심했던 학생의 행위는 이나라 보수진영에서 ‘애국’으로 칭송받기에 충분한 것이다. 여전히 반공을 국시로 삼고 있는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저 학생이야말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애국자다.
학생 역시 그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임씨를 고발한 학생은 고발사실을 자랑스레 학교 측에 알려왔다. 저 학생이 강사를 고발하고 느꼈을 공명심은 80년대 이근안이 학생들을 고문하면서 느꼈던 공명심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한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탄압하는 사람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나라다.
‘다른 생각’이 고발-처벌될 수 있는 나라에서 이성적인 토론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를 어떤식으로 해석하더라도 ‘다른 생각’을 고발하는 것이 용인될 수는 없다.
이번 해프닝은 국가보안법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것의 ‘사용자’들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든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