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신장운동 바람이 불던 1973년, 여성 테니스 1위인 빌리 진 킹(엠마 스톤)은 남성 선수에 비해 턱없이 적은 여성 토너먼트의 상금에 불만을 가진다. 이에 기존의 열리던 토너먼트를 보이콧하고 여성테니스협회를 설립해 여성 선수들만의 토너먼트를 이어간다. 남성 중심의 스포츠 업계의 냉담한 반응에도 빌리 진 킹과 여성테니스협회는 스폰서의 협찬까지 따내면서 나름 성공적으로 투어를 이어간다.
그러던 중 빌리의 이러한 행보를 주목하던 왕년의 챔피언이자 도박을 즐기는 바비 릭스(스티브 카렐)가 그녀에게 10만 달러의 상금을 건 경기를 제안한다. 평범한 회사원의 생활에 무료함을 느낀 바비는 다시금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 이러한 판을 벌인 것이다. 빌리는 처음에는 이 제안을 거절하지만 이것이 세상을 바꿀 기회임을 깨닫고 세기의 빅 매치를 준비한다.
〈빌리진 킹: 세기의 대결〉은 1973년에 있었던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세기의 성 대결(Battle of Sexes)’라는 원제처럼 영화는 121분의 러닝타임 내내 테니스계, 스포츠계, 더 나아가 사회 전반에 깔린 “남성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며, 때문에 스포츠, 정치, 가정 등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는 남성이어야 한다.”는 인식에 맞선 빌리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영화는 테니스협회 회장인 잭 크레이머(빌 풀먼)이나 바비 릭스의 노골적인 여성 비하 발언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빌리는 이를 끊임없이 되받아친다. 세기의 대결을 준비하며 훈련하고 고민하는 빌리와 특유의 쇼맨십을 선보이며 사람들을 휘어잡는 데 집중하는 바비를 교차 편집해 보여줄 땐 이미 테니스공을 주고받는 랠리가 시작된 것만 같다.
기대보다 더욱 흥미진진하게 연출된 테니스 경기 장면을 보고 있자면 마치 빌리와 바비의 경기가 열린 돔 경기장에 앉은 관중이 된 것처럼 1973년 당시의 열기와 흥분이 느껴진다.
영화에는 분명 아쉬움도 존재한다. 예상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전개와 좁은 공간 속에 모인 사람들을 훑는 핸드헬드 촬영은 산만하게 느껴지고, 바비 릭스의 비중은 단순히 빌리 진 킹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러닝메이트 수준보다 조금 과하게 많아 보인다. 후반부 바비가 아내인 프리실라(엘리자베스 슈)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장면이나 오만한 모습을 전시하는 듯한 장면은 이따금 빌리에게서 정말로 스포트라이트를 앗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행히도 〈빌리 진 킹〉은 중심을 놓치지는 않는데 이는 배우들의 공이 크다. 엠마 스톤은 〈라라랜드〉가 아닌 이 영화로 오스카를 받았다 해도 놀랍지 않을 연기를 선보인다. 개인적으로 살면서 겪을 거라 상상하지 못한 감정이 영화를 보다 연기를 통해 전달되고 관객인 나 역시 그러한 감정으로 들어갈 때 놀라곤 한다. 〈빌리 진 킹〉의 엠마 스톤은 그러한 순간을 몇 차례고 만들어낸다.
바비를 연기한 스티브 카렐은 수다스러우며 오만한 캐릭터 그 자체가 되었으며 엘리자베스 슈, 사라 실버맨, 알란 커밍 등의 연기 역시 영화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빌리가 자신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준 마릴린 역의 안드레아 라이즈보로와 남편 래리 킹 역의 오스틴 스토웰은 영화에 안정감을 더한다. 성 정체성에 대한 빌리의 고민을 담은 마릴린 캐릭터와 조신하게 내조하는 래리 캐릭터는 빌리의 이야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영화를 보며 자연스럽게 〈히든 피겨스〉가 떠올랐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성차별과 맞서는 천재들. 자신의 능력을 통해 유리천장을 부수고 정상을 향해 가는 사람들. 주변의 여성들과 연대해 어떤 흐름을 만들어가는 여성들. 물론 두 영화 모두 어떤 분야의 천재이기에 유리천장을 깰 수 있었다는 서사로 귀결된다는 점이나 인종적/계급적 함의를 담아내는 데 있어서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는 점은 아쉽다(〈빌리 진 킹〉의 마지막 장면에서 게이인 테이(알란 커밍)와 클로짓 레즈비언인 빌리 사이의 연대가 드러나는 부분은 좋았다).
그러나 나사의 컴퓨터로 불리는 여성 직원들을 모아 복도를 행진하는 〈히든 피겨스〉의 천재들이나 단숨에 테니스협회의 토너먼트를 보이콧하고 여성테니스협회를 설립해 기어이 성공시키는 빌리의 모습은 그 자체로 기념비적인 모델이 된다. 〈고스트버스터즈〉나 〈원더우먼〉 같은 픽션 속 여성 영웅과 더불어 현실 속 여성 영웅을 계속해서 스크린으로 소환하는 흐름이 이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