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자존감 ‘열풍’이다. 서점에는 자존감에 대한 책들이 한가득이다. 성인교육 시장에는 열등감 극복, 자존감 향상을 목표로 내건 강연과 워크숍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포털 사이트 등에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검색하기만 해도 관련 자료가 수두룩하게 쏟아진다. 그야말로 자존감은 현재 대단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듯하다.
심리학 전공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일견 기쁘다. 대중이 드디어 자존감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그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는 인상을 받아서다. 행복하지 않은 것이, 일을 하며 신바람이 나지 않는 것이, 인간관계가 평온하지 않은 것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존감의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자존감. 참으로 마법 같은 단어다. 자존감을 다룬 책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만악의 근원이자 무엇이든 뚝딱 해결해주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것이 곧 자존감이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문제들의 근원에는 자존감 부족이 자리 잡고 있으며 따라서 자존감을 드높이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 방도라고 이야기한다.
심리학자들 역시 이 자존감 개념에 대해 그간 많은 관심을 쏟아왔다. 실제로 심리학계에서 이 ‘자존감(Self-esteem)’만큼 많이 연구된 분야도 없다. 심리학자들 역시 행복, 성숙, 자아실현에 이르는 길에는 반드시 높은 자존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다양한 관찰과 실험 연구들을 통해 자존감이 학업성취, 대인관계 만족도, 주관적 안녕감, 자기효능감, 지각된 통제감 등 다양한 긍정적 심리 자원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밝혀져 왔다.
사람들은 왜 자존감에 열광할까? 자존감을 갈구하는 이유는?
현재의 자존감 열풍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힘든 일상에 갇혀 괴로워하는 현대인들이 자존감이라는 단어에 희망을 거는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자존감을 통해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기에, 자존감 책을 사보고 자존감 강연을 들으며 자존감 코칭을 받게 되는 것일까?
표면적인 이유는 물론 ‘행복’, ‘자아실현’, ‘자기탐색’, ‘강점 찾기’, ‘삶의 의미 찾기’, ‘성숙하기’, ‘내 삶의 주인 되기’, ‘회복탄력성’ 등이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왜 자존감을 높이려 하십니까?’라고 질문하면 십중팔구 위와 같은 답을 듣게 되리라.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전부일까?
실질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이는 것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들이 아니다. 성공, 행복, 의미, 가치 등등. 좋은 인상을 주는 말들은 맞다.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추상적이고, 애매하고, 막연하고, 상투적이다.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은 막연함에 이끌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더욱 직관적이고 명확하며, 감정적인 것으로부터 본능적인 이끌림이 나온다.
우리 사회에서 자존감 담론이 ‘열풍’으로까지 진화한 것, 여기에는 분명 행복, 자아실현 등 표면적인 이유가 아닌, 필시 다른 속사정이 숨어있을 것이다. 사실 행복해지고 싶다, 자아탐색을 하고 싶다 등의 생각은 항상 있어 온 것이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따라서 단지 ‘행복해지자’, ‘나를 바로 알자’는 것이 자존감 추구의 이유였다면, 자존감이 ‘새삼스레’, ‘이제 와서’ 이렇게까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으리라. 생각해보건대 사람들의 마음을 본능적으로 흔드는 그 어떤 것. 자존감이라는 말 속에는 바로 그런 힘이 숨겨져 있지는 않았을까?
심리학자 허태균 교수는 그의 저서 『어쩌다 한국인』(2015)에서 총 여섯 가지의 한국인의 심리적 특성을 주장한 바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첫 번째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주체성’이다. 사실 과거 심리학계에서는 이 주체성이라는 특징이 서구인들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상당수 빛이 바랬지만 당시에는 ‘상식’과도 같이 여겨졌던 것이 곧 개인주의(Individualism) – 집단주의(Collectivism) 분류다.
서구에는 개인주의 문화권이 보편적이며 주체성, 자율성, 자기완성 등을 주된 가치로 삼는 반면 한중일 등 집단주의 문화권에서는 관계 중시, 조화, 협력, 상생 등을 중시한다는 것이 곧 개인주의-집단주의 분류의 요지다. 따라서 주체성이란 말 그대로 한국인에게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서구인들의 특징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주의-집단주의 분류 체계는 최근 십수년 새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방대한 문화권들을 어떻게 저 두 가지 범주로만 구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과 함께 ‘개인주의 문화권’, ‘집단주의 문화권’으로 통틀어 분류되던 국가들 간에도 상당한 심리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여러 실증 연구들을 통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과연 ‘주체성’은 서구인들의 전유물인가? 한국인은 주체적이지 않은가? 주체성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인과 일본인은 어떤 세부적 차이가 있는가? 등등 개인주의-집단주의 분류에서 탈피된 새로운 논의들이 (비교)문화심리학계 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한국인들의 주체성은 약하지 않다. 다만 한국인들은 관계중심적이므로 ‘관계 속에서의 주체성’을 원할 따름이다(허태균, 2015). 관계의 유지 및 조화, 협력 등을 중시하되 관계 속에서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싶어 하는 것이 곧 한국인들의 심리라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관계 내에서의 존재감을 매우 중시한다. 타인들에게 과시하고, 자신의 우월한 존재감을 내 보이기를 원한다. 그만큼 타인들로부터 무시받는 것은 죽도록 싫어한다. 단지 무시를 받았다는 이유로, 사람을 해하기도 하는 것이 곧 한국인이다(기사: ‘날 무시해?’ 농기구로 살인 저지른 70대, ‘평소 무시하고 막말’… 옛 직장동료 찾아가 흉기 ‘살인미수’ 50대 징역 2년 6월 선고).
존재감을 충분히 어필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존재감이 ‘사라지는’ 상황만은 막아야 한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유독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바로 ‘나도’라는 말이다.
‘나도’ 갖고 싶어, ‘나도’ 하고 싶어, ‘나도’ 저기 껴들고 싶어, ‘나도’ 잘 살고 싶어, ‘나도’ 좀 해보자, ‘나도’ 좀 살자 등등. 일각에서는 이러한 한국인들의 ‘나도’ 사랑을 가리켜 ‘냄비근성’이라 비꼬지만, 이러한 현상은 그만큼 한국인들에게는 그만큼 존재감을 놓치고 싶지 않은 강한 심리적 특성이 자리 잡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종종 생각한다. 주체성이 강한 한국인들이 원하는 ‘자존감’이란 사실 그리 느긋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상사에 치이고, 고된 노동에 치이고, 부족한 휴식에 치여 힘들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나 아직 죽지 않았다’라고 울부짖고 싶은 마음은 아닐까.
행복해지고, 성숙해지고, 자아실현에 이르는 것도 물론 좋겠지만 그보다 앞서 나도 잘할 수 있다고, 나도 좀 사회에 존재감을 어필하고 싶다는 그런 절박함. 취업도 안되고, 일도 잘 안 풀리는 지금의 현실이 분하고 슬픈 나머지, 감추려야 쉽게 감출 수 없이 스며 나오는 어떤 울분(鬱憤). 21세기형 한(恨)의 집약체. 그것이 곧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자존감’ 이야기에 숨은 의미는 아닐까.
저도 상처받지 않을 권리 있습니다.
몇 달 전 공중파 뉴스에서 ‘자존감 열풍’에 대해 짧게 다룬 바 있다. 그런데 뉴스 중 등장한 어느 드라마 출연자의 대사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면접관 앞에서 울분을 참으며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당당히 말하던 취업준비생의 모습이야말로 곧 우리가 지금 가장 절실히 원하는 ‘자존감 추구’의 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한국인들을 위한 자존감 향상에는 다름 아닌, 힘겨운 현실로부터 주체성을 유린당한 한국인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시도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일지 모른다. 혹자들은 ‘자존감’과 ‘자존심’을 엄격히 구분하지만, 한국인들에게 있어 그 두 단어의 거리가 과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인가. 자존감이 곧 자존심이 되고, 자존심이 또 자존감이 되기도 하는 것이 곧 ‘한국인 자존감’은 아닐까.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