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알파벳을 음료수로 배웠다. 엄마도 아빠도 일을 나간 방안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은 나와 음료수병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엄마가 감기약인 판콜을 마시고 있는데 병에 적힌 ‘에스(S)’를 소리 내어 읽은 적이 있다. 우리 가문 역사상 최초로 잉글리시 툴(?)을 장착한 지니어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베지밀A, 베지밀B, 오로나민C, 박카스D, 박카스F… 그렇다. 학습지나 과외 없이도 우리는 음료수만 있으면 영어를 익힐 수 있다…라고 생각했으나 나의 음료 영어 실력은 알파벳을 읽는 데에 멈춰있다. 20년째 영어 유망주인 마시즘. 오늘은 음료수 뒤에 붙은 알파벳의 의미를 찾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베지밀 뒤에 붙은 알파벳을 모르고 마신다는 것은 보약과 사약을 블라인드 테이스팅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다. 물론 A를 마시든, B를 마시든 생명은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나빠질 일은 없다만, 그것은 44년간 국민들의 건강을 챙겨준 베지밀을 대하는 도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베지밀A의 뜻은 무엇일까. 에이스? 아니다. 정답은 어덜트(Adult, 어른)다. 베지밀의 원조인 베지밀A는 아이는 물론 어른도 마셔도 좋다는 의미에서 A를 담았다는데. 세대에 상관없이 베지밀을 판매하겠다는(?) 정식품의 의지가 돋보인다.
베지밀A의 뜻을 알았다면 베지밀B의 뜻은 쉬워진다. 베이비(Baby, 아이)다. 기존 베지밀을 부담스러워할 아이를 위해 달콤함과 땅콩 향을 추가했다. 이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베지밀B만 찾는 철없는 어른들이 아직도 있다. 그게 나다. 단 게 최고야.
박카스 역시 알파벳으로 빠질 수 없는 음료다. 알약으로 시작했던 박카스는 마시는 기능이 추가되며 이름의 끝에 D(Drink, 마시다)를 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박카스의 D를 드링크라고 부르는 자는 하수다. 박카스는 D와 F로 분화하며 그 뜻을 바꿨기 때문이다.
박카스F는 포르테(Forte, 강하게)라는 뜻을 가졌다.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웠던 포르테, 포르티시모… 의 포르테가 맞다. 피로를 강하게 회복시켜준다는 음악적인 비유랄까? 멋스러웠는지 이가탄도 같은 뜻의 F를 쓴다.
박카스F는 편의점용으로 변하며 새로운 박카스가 익숙한 이름을 달고 왔다. 박카스D다. 새로운 박카스D는 더블(Double, 두배)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박카스의 핵심인 ‘타우린’의 용량을 1,000mg에서 2,000mg으로 늘렸기 때문이다. 본격 박카스 2배.
비타민 음료수의 대명사. 오로나민과 아로나민. 사실 글을 쓰는 지금도 헷갈리는 이름이지만 뒤에 붙은 알파벳으로 해당 성분을 쉽게 알 수 있다. 비타민 음료수에 붙는 알파벳은 숨은 뜻보다는 성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훨씬 유용하다.
먼저 요들송으로 유명한(?) 오로나민C의 메인 영양소는 당연히 ‘비타민C’다. 오란씨, 비타C, 제주감귤비타C 모두 비타민C가 북 치고, 장구 치는 음료수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아로나민 골드(줄여서 아로골드)D는 ‘비타민D’를 의미를 담았다. 어렸을 때는 비타민D 그깟 거. 나가서 햇볕만 좀 쬐면 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교복을 입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각보다 현대인의 삶에서 햇빛 아래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료수 뒤에 붙은 알파벳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까스활명수는 큐(Q, Quick, 빨리, 빨리 소화되고, 빨리 팔자)고 판콜은 에스(S, Strong, Speed, Safe, 강한 음료수를 빨리 팔아 안전한 회사를 만든다?)다. 사람들이 제품의 이니셜 뜻을 알면 더욱 필요에 맡게 제품을 선택할 것이라는 기대와 다르게… 사실 이것들은 너무 어렵다.
알쏭달쏭한 이니셜 하나보다 차라리 문자를 더 써보는 것은 어떨까? 까스활명수LTE(LTE 급의 소화 능력), 야쿠르트XL(용량이 큰 야쿠르트라는 것), 솔의눈TT(솔의눈 마시면 눈물이 난다는 것), 지코RIP(지코를 마신 당신의 명복을 빈다는 것). 훨씬 21세기 감성의 음료가 아닌가?(아니다)
오늘도 이렇게 영어를 핑계 삼아 음료수를 즐긴다. 엄마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