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 여성을 본다. 거의 대부분 임산부 배지를 가방 위에 올려놓고 그 가방은 다시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십중팔구가 그랬다. 지나가던 누구에게라도 잘 보이게 올려진 임산부 배지로 증명하고 싶었던 건 무얼까?
어떤 젊은 사람이 노약자석에 앉을 수도 있다. 그는 오늘 하루 녹초가 되게 피곤했을 수도 있고 몸이 아파 조퇴하는 길일 수도 있다. 장애가 있었을 수도 있고, 임신 초기인 데다가 증명할 배지를 발급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정들과는 상관없이, 그 자리에 앉기까지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수많은 의심의 눈초리들, 혹은 어떤 정정한 노인네의 시비. 어쩌면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 찍힌 사진까지.
가만 보면 노약자석에 앉기 위해서만 증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여기저기 증명해야 할 것들 천지다. 범람하는 사건들에서 관전자들은 심판을 내리기 위해 순수한 자와 악마를 구분하려 애쓴다. 첨예한 시시비비의 대안으로서 등장한 것은 슬프게도 공인된 증명인 배지다. 물론 모든 것을 배지나 자격의 공증으로는 설명할 수는 없고 보통은 주관적 설명을 통해 관전자의 판정을 기다린다.
이따금 강력하고 촘촘하게 구성된 세상에서 뻔하디뻔한 말은 곧 아무것도 아니며 무기력하단 것이 슬플 때가 있다. 맥락은 사라지고 결론만 내걸려 판단되는 세상은 너무나 초현실적인 현실이라서 낯설다.
점심 메뉴 하나를 결정하기까지도 수많은 이유와 조건들이 수반되지만 우리는 그런 복잡함을 풀어내기보다는 인스턴트 같은 결론 내지는 정의를 원한다. 서로를 배려하고 각자의 맥락을 이해하고 혹은 이해받는 세상. 그런 건 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나도 수많은 이야기들을 간단하게 판단하고 소비해버렸다. 앞으로도 자주 그럴 것이다.
그래도 슬프긴 슬프다. 임산부 배지를 내보이며 불안하게 자리를 잡은 사람들, 그들이 그곳에 앉아도 되는지 안 되는지 판단할 준비가 된 수많은 사람들. 서로 다를 바 없을 그들인데, 그 사이의 간격이 너무 커 보여서 문득 외로웠다.
원문: 백스프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