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내걸었던 여성 할당 공약에 공기업들은 여기저기서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샅샅이 뒤져도 대상자가 없다”고 말한다. 아주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닐 수 있다. 공기업이나 대기업들은 소위 ‘승진코스’란 게 존재한다. 임원은 한 업무만 파악해서 일 처리를 할 수 없기에 순환보직을 돌고 여러 업무를 파악한다. 소위 이 코스를 밟아야만 임원의 ‘후보’가 될 자격을 얻는다. 명시적인 것은 없을 테지만 암묵적으로 존재한다.
실제로 이 기사에서 말하듯, 여성은 채용에서부터 차별을 받아왔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만 놓고 본다면 질 좋은 일자리 중 몇몇 특수한 직군이나 업종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걸 뚫고 힘들게 입사한 여성들은 또 다른 여러 과제를 맞닥뜨린다. 경력단절을 이겨내기 위해 ‘슈퍼 맘’이 되든지 아니면 결혼을 포기하든지 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대부분 남성인 상사들이 그 여성을 ‘키워줄’ 리 만무하고 승진코스를 제대로 밟을 확률도 낮을 것이다.
단념하기 쉽다. 여성 임원이 1~2%를 오가던 시절, 아니 그 이전에 여성이 감히 임원이라는 걸 할 수 없었던 시절 입사했던 이들 중, 나는 저 유리천장을 뚫고 승진해 임원의 자리에 오를 거라는 포부를 품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으며 그래서 성공한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물론 없진 않다. 간신히 유리천장을 뚫고 나온 여성은 주목받으며 ‘여남 평등 신화’의 소재로 사용된다. 얼마 전 취임한 네이버 한성숙 대표는 “여자라서 안 되는 일 없었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래서 역설적으로 여성 할당제는 더더욱 필요하다. 이제 기업들은 의무적으로 할당된 수치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평등한 조건의 모양새를 갖춰야 한다. 채용에서의 차별을 조금이라도 제거해 유능한 여성 인력을 뽑으려 해야 할 것이며, 이 할당제를 위해서라도 경력단절이나 유리천장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법은 이러한 조치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판결한 적이 있다.
“여성과 장애인은 유형·무형의 성적 차별 내지 사회적 편견 · 냉대로 능력에 맞는 직업을 구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이 현실”이며 “종래부터 차별을 받아 왔고 그 결과 현재 불리한 처지에 있는 집단을 유리한 처지에 있는 집단과 동등한 처지에까지 끌어 올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다.”
(98헌마363)
당장 “대상자가 없다”고 하기 전에 그 대상자를 찾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하지 않나. 그건 역차별이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자격을 얻을 조건’조차 박탈했던 역사들을 기억하며 시정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나? 이 조치들은 십수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빛을 발할 것이며 아마 그때쯤이면 ‘여성은 무능력하다’는 부당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사라질 것이다. 그로 인해 아주 조금은 진보할 수 있다. 나는 제도의 선개입을 좋아하지 않지만, 때론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
과거 역차별에 관해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역차별이라는 것도 사실 근시안적인 관점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사회적 자원을 과점하는 집단이 그 과점을 통해 더 나은 결과를 얻었다면 그 결과만 가지고 능력을 평가하는 게 과연 정당한가. 역차별이라는 이야기는 특정 집단에 의한 사회적 자원의 과점이 어느 정도 해소된 상태에서야 비로소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는 많은 차별시정조치들은 ‘역차별’이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차별을 개선하기 위한 ‘잠정적인 조치’라고 불러야 함이 마땅하다.
물론 이런 가시적인 조치들에 의해서 누군가가 희생당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적극적 우대조치는 그 희생 너머의, 비가시적이며 일상적인 희생들과의 이익형량을 통해서 정당성을 획득한다. 누군가에게 손해가 갈 수 있으니 이런 우대조치들을 금해야 한다는 ‘불평등의 비당사자’들의 주장은 그래서 때로는 한가해 보이며,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헌법의 결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나는 적극적 우대조치의 일환으로서 고용할당제를 전적으로 환영하며 더욱더 확대적용 되길 강력하게 요청한다.
원문: 백스프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