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진보 이분법이 무익하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정말 지겨울 정도로 여러 번 나왔다. 그러나 요즘 정국은 다른 의미에서 ‘과연 한국 보수라는 말이 실체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여러 사람이 그것을 잡으려 하지만 유령처럼 잡히지 않아서, 애초에 허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만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친박세력이다. 박근혜가 아버지인 박정희의 신화까지 껴안고 정치적 동반자살을 한 지금 시국에서 보수가 곧 친박세력이라고 말하기는 껄끄러워졌다. 때문에 정말 늦었지만 박근혜의 출당을 자유한국당이 결정하고, 친박의 거두인 서청원과 홍준표가 싸우는 일까지 벌어지는 것이다.
자잘한 계산을 뒤로하면 홍준표는 ‘친박이 아닌 보수는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 이미 한 단계 부정된 바 있다. 만약 친박이 아닌 보수라는 것이 실체라면 사실은 박근혜를 탄핵한 정국에서, 압도적인 국민들이 탄핵에 찬성하는 국면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은 바른정당이 보수 세력의 중심에 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른정당을 만든 사람들도 그걸 기대하고 자유한국당을 나간 것이 아닌가?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는 국정원 돈까지 써가면서 친박들의 당, 박근혜-박정희에 충성스러운 사람들만의 당을 만들려고 했다. 그 결과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은 사실 친박당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내부로부터의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일군의 사람들이 새누리당에서 탈당해 바른정당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정국은 아주 묘하게 흘렀다. 현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의 다수는 바른정당이 아니라 자유한국당을 선택했다. 친박이 아닌 사람들이 탈당해 더더욱 순수하게 친박당이 되어버린 자유한국당을 말이다.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말 주요 정당 지지율은 민주당 51.7%, 자유한국당 16.8%, 국민의당 6%, 정의당 5.9%였으며 바른정당은 4.8%밖에 안 됐다. 결국 바른정당은 1차, 2차 탈당사태가 일어나면서 소멸 위기에까지 몰렸다. 이런 현실을 보면 상당수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결국 친박이 아닌 보수란 매우 미미하며 허상에 가깝다.
친박세력이란 자신이 이미 죽은 것을 모르는 좀비나 마찬가지다. 천지개벽할 정치적 변화가 앞으로 또 있을까. 친박의 정치적 복권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앞으로도 박정희의 신화는 더더욱 망가질 것이다.
한국 정치는 1987년 6월 이후 불가역적인 변화를 겪었다. 실질적 내각제의 실시로 이 현실을 타파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국민이 이뤄낸 대통령직선제라는 것은 그저 세계 보편적 차원에서 말하는 정치 형태의 하나가 아니라 한국 시민들의 강력한 의지로 일궈낸 게임의 법칙이 되었다.
그래서 1987년 이후 군사 쿠데타는 없었고, 선거 개입같이 대통령 직선제를 부정하는 일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 되었다. 이건 헌법적 질서에서도 중심적 지위에 확고히 도달한 것이다. 그냥 남이 써준 헌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희생으로 만들어 낸 질서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탄핵된 대통령인 박근혜는 다시 한번 한국 정치가 불가역적인 변화를 겪게 한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자유한국당이나 자칭 보수세력은 물타기를 통해 관행이니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그랬느니 하면서 과거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탄핵은 세계적으로 화제가 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참여한 촛불집회가 만들어 냈고, 검증되지 않은 비선실세가 존재하고 관행이라는 이유로 법적인 근거도 없는 돈과 권력이 남용되는 정치를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박근혜뿐 아니라 앞으로도 박근혜 스타일로 정치하려는 사람은 정치적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 박근혜 스타일이 결국 박정희 스타일이고 과거 선거에서 박정희처럼 보이려고 하는 후보가 많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변화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과거 자칭·타칭 보수세력의 승리 방정식이 깨졌다. 이제는 선거에 나와서 박근혜 박정희 만세를 부르는 것으로는 집권세력이 되기 어렵다. 적어도 앞으로 몇 년간은 그럴 것이 확실하다.
이런 현실에 기반 두고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질문은 앞으로 몇 년간 한국 정치를 지배할 질문이다. 과연 친박이 아닌 한국 보수라는 것은 실체인가 유령인가?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세력인가, 아니면 앞으로 만들어질 세력인가? 이것은 보수를 어떻게 해석하냐의 문제다. 많은 사람에게 사실 문재인 정부는 보수 정부다. 민주당이 보수다. 그러나 지금 홍준표나 유승민이 찾아 헤매는 보수는 물론 이런 보수가 아니다.
그들은 친박이 아닌 한국 보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진지하게 그렇게 믿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주장에 회의적이다. 다시 말해 친박이 아니면서 유의미한 한국 보수라는 세력은 없다고 믿는다. 한국 보수 세력의 대표적인 특징이 비일관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상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다. 한국 보수세력은 이미지만 있고 욕망만 있을 뿐 제대로 된 사상이나 자아 성찰이 없다.
물론 보수세력에도 학자나 문인은 있어왔기에 보수세력에도 사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현실을 보려면 정권 그 자체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보수세력에게 이성이나 학문은 그저 장식에 불과하다. 북한 정권의 공산주의가 그저 장식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다. 북한이 실질적으로 김일성 일가의 왕국이듯 한국 보수라는 것도 쿠데타로 세워진 왕국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대한민국의 헌법과 양립하면서 주장할 수 있는 사상이나 그때부터 지켜온 가치가 없다. 오죽하면 뉴라이트나 일베 같은 것이 번성했겠는가? 그러니까 한국 보수라는 것은 박근혜가 실각했어도 박사모처럼 여왕을 계속 모시거나, 또 다른 박정희 일가의 피를 찾아 새로운 왕을 옹립하거나, 또다시 피와 힘으로 쿠데타하고 정권을 장악해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들은 21세기 한국에서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박근혜는 부활할 수 없고 박정희 왕조는 죽었다. 재벌도 무력 쿠데타를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공화국에서 의미 있는 정치세력은 사실 관념적으로, 사상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세력의 뿌리는 쿠데타 같은 폭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무력 쿠데타는 없다. 그러니 사상이 없으면 정치세력도 없다. 폭력으로 만들어 인정받던 과거의 세력은 한번 죽으면 다시 부활할 수 없다.
그 세력이 이제 폭력이 아니라 사상과 이성으로 부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폭력으로 만들어진 세력의 본질은 반이성적이기 때문에 반사상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세상에 내놓을 만한, 일관성 있고 깊이 있는 사상이라면 박사모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들에게 통하는 사상이란 생각하지 말고 충성하라는 것밖에 없다. 일관성을 찾기 시작하면 눈을 뜬 광신도들에게 보이는 것은 추한 자신의 모습들뿐이다.
이런데도 여전히 정치판은 한국 보수를 찾아 헤맨다. 그것은 폭력과 부패를 기반으로 일어난 적폐 권력이 한국에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갔지만 재벌은 가지 않았다. 재벌은 후원자는 될 수 있어도 그 자체가 정치적 세력이 될 수는 없다. 민주국가는 1인 1표이지 주주총회처럼 돈 많은 사람이 주인인 세상이 아니다.
재벌을 지배해 온 가문들이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고 시대를 따를지, 한국의 미래를 걸고 싸움에 나설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박근혜가 감옥에 있는 지금 다음 싸움의 장소가 재벌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재벌 회사를 비민주적이고 초법적으로 지배하는 가문들이야말로 적폐의 또 다른 본진이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