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Economist의 「Making sense of the culture war over transgender identity」를 번역한 글입니다.
높은 광대뼈를 가진 아름다운 남성이 긴 속눈썹을 자랑하며 클럽으로 들어섭니다. 머리에는 은색 반짝이를 뿌리고, 웨딩드레스와 너저분한 운동복을 함께 코디했죠. 런던 클럽에서 이런 식의 성 역할 파괴(gender-bending)는 새로울 것 없는 현상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에만도 크로스드레서가 잔뜩 등장하고, 남장 여배우인 글래디스 벤틀리가 활동한 것이 1920년대, 데이비드 보위의 지기 스타더스트가 등장한 것이 1970년대의 일이니까요. 새로운 것은 기존의 성 정체성을 거부하는 선언이 이제 무대나 댄스 클럽을 벗어나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왔다는 점입니다.
‘젠더’라는 단어는 ‘섹스’라는 단어의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순수주의자들에게는 문법을 논할 때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이코노미스트의 스타일 가이드도 최근까지 그와 같은 정책을 고수했죠). 1970년대 들어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또는 남성에게 어울린다고 여겨지는 행동 양식을 일컫는 말로 ‘성 역할(gener role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성 정체성(gender indentity)’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여기고 어떻게 표현하고자 하는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생물학적 성별이나 성적 지향과 다른 의미를 담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젊은이가 자기 자신을 비이분법적 성인 ‘논바이너리(non-binary)’로 소개하죠.
젠더가 스펙트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젠더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페이스북은 유저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성 정체성으로 70개 이상의 옵션을 제공하며, 거기에 각자가 설명을 붙일 수 있도록 합니다.
이처럼 새로운 성 정체성의 개념이 이전의 개념과 가장 격하게 충돌하는 곳은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입니다. 트랜스젠더는 출생 신고서에 찍힌 성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로 남성에서 여성, 또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는 신체를 갖기 위해 호르몬 요법이나 수술을 받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의 래번 콕스나 올림픽 챔피언 출신의 케이틀린 제너와 같은 유명인사가 주목을 받기도 했고 2016년 12월 《내셔널지오그래픽》은 트랜스젠더 아동을 표지 모델로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트랜스젠더들의 존재감 확대에는 일면 놀라운 부분이 있습니다. 성별 불쾌감(gender dysphoria)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클리닉이 고객 수 증가를 보고하지만 트랜스젠더는 여전히 소수니까요.
LA의 한 싱크탱크는 최근 미국에 약 140만 명의 트랜스젠더가 있다는 추정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16-65세 인구 중 0.6%에 불과하죠. 젊은이 사이에서 젠더가 예전에 비해 덜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는 가운데서도 성전환이라는 힘들고 위험한 과정을 감수할 만큼 극심한 성별 불쾌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도 일견 모순된 상황처럼 보입니다.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은 이들을 자연과 신의 뜻에 반하는 존재로 보는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 같은’ 외모에, ‘여자처럼’ 느끼고, 행동하는 것으로 여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믿음과, 모든 여성이 각자 원하는 대로 행동해도 자신의 ‘여성성’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일부 트랜스젠더 활동가들과 이들이 TERFs(trans-exculsionary radical feminists)라고 부르는 트랜스젠더 외 급진 페미니스트 여성 사이에는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의 쉼터에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소를 허용할 것인가,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대회에 트랜스젠더의 참가를 허용할 것인가 등 다양한 문제에서 논쟁이 일고 있죠.
이런 문제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절실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성 정체성이라는 것이 인간의 특성으로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죠. 미국에서는 누가 어떤 화장실을 사용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문화 전쟁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부모들에게도 어려운 과제를 안겨줍니다. 자녀가 자신의 성별이 잘못되었다고 느끼면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굳이 성별을 바꾸지 않아도 원하는 대로 옷을 입고, 원하는 활동을 하고, 원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 된다고 말해주어야 할까요? 아니면 자녀가 성전환하도록 도와줘야 할까요? 자녀의 정체성이 나중에 다시 바뀔지는 또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여성, 남성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달려있습니다. 출발점은 일단 유전학입니다. 인간 여성은 두 개의 X염색체를, 남성은 하나의 X염색체와 Y염색체를 가지고 있죠. 여기에서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차이를 낳는 호르몬적 차이가 발생합니다. 대부분의 차이는 태아 시기와 사춘기에 만들어지죠. 사람들은 이러한 신체적 차이로 인해 여성, 또는 남성 가운데 한쪽으로 쉽게 분류될 수 있습니다.
인간 여성과 남성은 대부분의 능력과 행동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케임브리지대학 심리학 교수인 멜리사 하인스(Melissa Hines)에 의하면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성 정체성입니다. 다음으로 두드러지는 특성은 성적 지향입니다. 일부를 제외한 다수가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죠.
생식과 관계없는 부분의 차이점은 더 모호합니다. 아기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바퀴 달린 자동차 장난감과 인형을 주면 남자 아기들은 자동차를, 여자 아기들은 인형을 택할 가능성이 조금 더 높다는 정도죠. 원숭이들도 비슷한 선호도를 보이므로, 진화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1% 정도는 ‘성 발달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그중 대부분은 성기의 경미한 이상을 보이는데, 의사들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죠. 이 같은 ‘간성(intersex)’의 경우 성기는 남성 성기와 여성 성기가 결합된 형태를 보입니다. XX염색체를 가졌더라도 뱃속에서 남성 호르몬이 이례적으로 높게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고 XY염색체를 가졌더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죠. 이들은 각각 XX, XY에 해당하는 몸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출생 신고서의 성별과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게 됩니다.
최근까지 간성 아동들은 의사가 몸에 어울린다고 판단하는 성별 쪽으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많은 사람이 아동이 자신이 원하는 쪽을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013년에는 UN 특별보고관이 간성 아동들에게 행해지는 성 결정 수술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간성은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건 성 정체성을 바꿀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이들의 존재, 그리고 이들의 다양한 젠더 표현을 보아도 생물학적 성이라는 것이 깔끔하게 이분법적이지도, 성 정체성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죠. 하지만 성별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호르몬이나 신체, 뇌에 알려진 이상을 보이지 않습니다. 일부 신경학자들이 이들의 뇌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지만, 납득하지 못하는 전문가들도 많죠.
이처럼 관찰 가능한 원인이 없기 때문에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이 느끼는 정체성을 남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트랜스젠더 건강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는 트랜스젠더 여성 다니엘 카스트로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시스젠더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게 성적 지향을 설명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느낍니다.
‘사랑은 그냥 사랑이다’라는 말이 더 이해하기 쉽죠.
성별 불쾌감을 호소하는 성인들에게는 성 재지정(gender reassignment)이라는 옵션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호르몬 요법을 받으면서 1-2년 정도 목표 성별로 살아보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성전환 수술을 받기도 합니다. 다수의 트랜스젠더들은 상체 수술(가슴 축소 또는 확대)만을 받습니다. 타인이 볼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죠.
의사들이 환자의 중대한 결정에 후회가 따를까 봐 걱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호르몬 요법 중에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있고, 성기 수술은 불임을 유발할 수 있죠. 반대로 의사를 설득하는 것은 트랜스젠더들에게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 과정에서 의사를 설득하기 위해 전형적인 남성성, 여성성을 과시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당사자들에게 고역이죠.
트랜스젠더 스스로가 성별 고정관념에 갇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의 격렬한 비판을 받는 부분이죠. 지난 3월 BBC 라디오4의 진행자 제니 머리는 트랜스 여성 두 명을 인터뷰했는데 그중 한 사람은 여성 직원의 화장을 의무화한 직장을 옹호하면서 여성의 다리털이 ‘더럽다’고 말했고, 한 사람은 직업이 목사인데 성전환 후 가장 큰 관심사가 ‘교인들을 만날 때 무엇을 입을까’라고 말해 논란이 일었죠. 작가 라이오넬 슈라이버(Lionel Shriver)는 지난해 영국 잡지에 기고한 에세이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여성이라고 느낀다’는 것이 마스카라를 바르고, 힐을 신고, 머리카락 연장술을 받고, 스타킹을 신고 싶다는 느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케이틀린 제너가 상징하는 여성성이라는 것이 내게는 낯설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같은 이유로 분노합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그 유명한 말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는 여성들의 삶을 억압해온 이상적인 여성성에 대한 비판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 그런 입장을 취하는 여성은 ‘TERF’라는 꼬리표를 달게 됩니다. 트렌스젠더 정체성에 대한 모든 탐구에 어느 정도의 위험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멤피스 로즈대학 소속의 철학자 레베카 투벨(Rebecca Tuvel)은 트랜스젠더 정체성에 동의하는 시각대로라면 자신을 흑인으로 명명한 백인 여성 레이첼 돌레잘 같은 경우에도 자신이 선택한 인종 정체성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써서 어마어마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학자 100명 이상이 이와 같은 주장이 트랜스젠더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며 철회를 요구했죠. 이들은 구체적인 예로 트랜스 여성을 남성일 때의 이름으로 부르는 행위(‘dead-naming’) 등을 들었지만, 문제의 트랜스 여성인 케이틀린 제너가 ‘브루스’로서의 삶에 대해 종종 언급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돌렸습니다.
트랜스젠더를 소외시키지 않는 언어를 구사하고자 하는 노력은 때로 ‘여성’과 ‘남성’이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지 않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일부 클리닉에서는 ‘전립선을 가진 사람’ ‘질을 가진 사람’ 등의 용어를 사용하죠. 스트레스와 생리 주기에 대한 한 학생 잡지의 기사에서도 ‘여성’이라는 단어 사용을 피하기 위해 ‘자궁을 가진 학생들’이라는 표현을 썼죠. 이런 식의 재정의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지향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남성보다 성차별, 성희롱, 임신과 피임 등 조직화하거나 집단적인 목소리를 낼 사안이 많은 여성에게 더 많은 과제를 안겨주죠.
화장실 문제와 같은 사안 때문에 기존 문화 전쟁에서 대립하던 페미니스트와 보수주의자들이 연합 전선을 구축하는 현상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안이 대수롭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 배척되거나 방해받지 않고, 순응하거나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매우 중시합니다. 반면 이런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는 트랜스 여성들에게 이같은 배척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죠.
‘성 정체성에 대한 위협’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트랜스 여성들의 HIV 감염률을 낮추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다니엘 카스트로는 일부 트랜스 여성들이 자신의 여성성을 의심받거나 위협받는다고 느껴 위험도가 높은 성생활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동성애자 남성들을 위한 HIV 방지 프로그램은 스스로 거부하고, 여성 전용 시설의 도움은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죠.
성별 재지정 클리닉이 생겨난 초기에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남녀 간의 심리학적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사회적인 요인 때문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부모들이 ‘털털한 딸’보다 ‘계집애 같은 아들’을 더 견디지 못하고, 남자같이 행동하는 여성보다 여성처럼 꾸미는 남성이 더 조롱받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오늘날 성별 불쾌감을 호소하는 여자 어린이의 수는 크게 증가했습니다. 남성적인 행동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핑크색 공주 드레스 일색에 여성의 성을 극도로 부각하는 대중문화 속에서 여성의 몸을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1965년 존스홉킨스 병원에서 미국 최초의 성별 재지정 클리닉이 문을 열었을 때 보도자료에는 ‘정신이 몸에 맞게 변할 수 없다면 몸을 정신에 맞게 바꾸는 것을 고려해볼 만하다’고 적혀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엄청나게 급진적으로 들렸던 이 말이 최근에는 활동가들의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정신에 맞게 몸을 바꾼다’는 개념이 동성애자를 이성애자로 바꾸는 ‘전환 치료’를 연상케 한다는 것입니다. 2015년에는 성별 불쾌감을 호소하는 아이들을 생물학적 성별을 좀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고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지는 않는지 신중하게 판단한다는 접근법을 취하는 캐나다의 한 클리닉이 활동가들의 반발로 문을 닫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클리닉 원장이 BBC 다큐멘터리에서 한 말(“4살짜리가 자기는 개라고 한다고 나가서 개밥을 사다 줍니까?”)은 엄청난 반발을 샀지만, 이 말 속에는 중요한 지적이 담겨 있습니다. 성별 불쾌감을 느끼는 모든 어린이가 전부 성인이 되어서도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캐나다와 네덜란드 연구진의 연구에 따르면 어린 시절의 트렌스젠더 정체성이 성인까지 이어지는 비율은 12%에서 39%에 그친다고 합니다.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은 다릅니다. 동성애자의 대다수는 스스로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죠. 트렌스젠더 가운데도 동성애자가 있습니다. 케이틀린 제너는 남성일 때 이성애자였지만, 여성이 된 후에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고 밝힌 바 있죠.
한편 성별 불쾌감의 원인이 일부 젠더 불일치뿐 아니라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시각에서 비롯된다는 연구 결과도 많습니다. 일례로 이란에서 남성 동성애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지만, 종교 지도자들도 사람이 ‘잘못된 몸’에 갇힐 수 있다고 믿죠. 이란의 동성애자 남성들이 성별 재지정 호르몬 요법을 강요받는 경우가 있는 이유입니다. 일부는 성전환을 피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대피하지만, 일부는 모국에서 편히 살기 위해 ‘치료’를 받아들입니다.
관련 클리닉에서 어린이들을 대하는 의료진 사이에서 다수 의견은 성별 불쾌감을 겪는 어린이들에게 2차 성징을 늦출 수 있는 약물을 처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성인의 신체’로 자라나기 전에 천천히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말이죠. 하지만 이 같은 ‘사춘기 지연 치료’가 평생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가 적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의사들에게는 아주 어려운 과제를 안겨줍니다. 전환을 일찍 시작하는 편이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지는 게 사실이고 정체성을 바꾸지 않을 아이들이 사춘기 지연 치료까지 받으며 결정을 유보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수 있죠. 하지만 어릴 때 성전환을 한 사람이 어른이 되어 후회하는 경우가 생긴다면요?
후회하지 않는 사람들도 성전환하지 않았을 때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알 수 없지요. 성전환에는 이런저런 의료적인 위험 부담이 따르기 마련이니까요. 또 트랜스젠더 어린이들의 일부는 시스젠더 동성애자 성인으로 자라나는데,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것이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여성인지 남성인지에 대한 특별한 의식도 없는 채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슈라이버 역시 “나는 ‘여성이라고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여성이다.”라고 적었죠.
전통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인한 억압이 줄어들면 자신에게 부여된 성 역할이 답답하다고 여기는 어린이들의 수도 줄어들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세상이 바라보는 자신과 스스로의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소수의 사람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할 것입니다.
원문: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