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에 모두가 주목하는 이유는, 당연하겠지만 인공지능 기술의 진보로 인한 변화가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으리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말 그대로 패러다임(paradigm)의 변화다.
그 변화는 사회 전반 영역에 걸쳐 일어나게 될 것이다. 실제로 변화가 반영된 모습은 제각각일 것이고, 변화를 수용하는 속도 또한 천차만별이겠지만 어쨌든, 4차 산업혁명의 흐름을 무시하고 고고히 제 모습을 지킬 수 있는 분야는 사실상 없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여기저기 ‘4차 산업혁명’을 대입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창조적인 유희 거리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와 함께 전면적인 변화를 맞게 될 것으로 예측되는 분야가 있다. 언론 등에서는 ‘향후 OO 년 뒤 사라질 가능성이 높은 직업 목록’, ‘4차 산업혁명 시대, 가장 유망할 것으로 기대되는 직업 목록’, ‘대체 가능성이 높은/낮은 직업’ 등등의 내용들을 주기적으로 조사하고 보도한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텔레마케터, 마트 계산원, 단순 제조업 직군, 회계사, 인공지능 전문가, 빅데이터 분석가, 큐레이터 등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하여 비교적 많이 논의되고 있는 일부 분야에만 머문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의 여파는 언론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이들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말 그대로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크고 작은 분야 하나하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들든,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든 반드시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의 변화를 몰고 올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각자의 영역에서, 4차 산업혁명의 여파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해본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현재 사회에는 약 1만여 개가 넘는 수많은 직업들이 있다.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하여 비교적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은 직업들도 있고, 전혀 그렇지 못했던 직업들도 많다. 과연 이 일의 미래는 어떨까? 저 일의 미래는 어떨까? 비교적 희귀 직업으로 알려져 있는 그 직업의 미래는 어떻게 바뀌게 될까?
패러다임에 변화에 맞서, 미래에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세심하고 꼼꼼한 고민들이 필요하다. 문학, 역사학, 철학, 종교학, 윤리학, 인류학, 기호학 등등 특히 4차 산업혁명, 기술 진보, 첨단의 영역 등과 일견 거리가 멀어 보이는 분야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내가 인문학 전공자로서, 그 분야가 퇴보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남은 선택지는 새로운, 제4의 길을 찾는 일뿐이다. 4차 산업혁명이란 결코 남의 일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심리학 분야는 어떨까? 흔히 심리학자, 특히 임상/상담심리학을 전공한 임상가/상담가의 전망은 밝다고들 한다. 인간이 인간을 만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그런 일을 로봇이 대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들이 나온다. 창의성, 감정, 공감, 철학적 사고 등 인간의 특장점이라 일컬어지던 부분들에 과연 로봇이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을지, 아직은 회의적인 시선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심리학자 스타노비치(Stanovich)는 그의 저서의 말미에서 그런, 일부 심리학자들의 안일한 태도는 잘못된 것이라 지적한다. 예를 들어, 소위 빅데이터 패러다임을 통해 구축한, 정신장애 진단 시스템의 정확도가 인간의 판단 수준을 위협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것을 상회하는 결과 또한 심심찮게 보고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언제까지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지금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은 우리가 먹고 자고 생활하는 그 일상 자체를 송두리째 뒤바꿔 놓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고려 대상 안에 들어와 있는 직업들을 아득히 뛰어넘어, 보다 많은 직업 영역들에 걸쳐 큰 변화들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물론 심리학(Psychology) 역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문화심리학(Cultural psychology)이 전하는 가장 큰 통찰 가운데 하나는 바로, 비록 동물로서의 인간이 지닌 본성은 변하지 않았더라도 시대에 따라, 그리고 문화에 따라 우리가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곧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문화 지체(cultural lag)를 넘어 변화에 적응하고 수용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면 새로운 시대를 대하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 패턴 또한 지금과는 분명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될 것이다.
새로운 인간과 인간이 만난다. 그리고 인간은 이제 로봇과도 만나 대화하고, 감정을 나누고, 행동을 같이하게 된다. 로봇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과 태도는, 인간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 태도와는 과연 어떻게 다를까? 가령 실제 강아지와 고양이와 놀아줄 때 느껴지는 여러 가지 긍정적인 감정들을, 과연 우리가 로봇 강아지, 로봇 고양이와 놀면서도 경험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로봇 펫(Pet)의 출현은 독거노인 등 외로운 우리 사회 이웃들의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을까?
행동치료 기법의 일종인 체계적 둔감화(systematic desensitization) 절차는 공포증 치료를 위한 훌륭한 접근법이 될 수 있다. 체계적 둔감화란, 환자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대상을, 아주 작은 형태의 자극부터 비교적 크기가 큰 자극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제시해 나가며 자극에 대한 체계적인 적응을 유도하는 기법이다.
그리고 체계적 둔감화 방법을 사용할 때 치료자는 보통 환자에게 공포를 느끼는 대상에 대해 한 번 ‘상상해볼 것’을 요청한다. 가령 어떤 환자가 뱀 공포증을 앓고 있다고 할 때, 공포 자극에 대한 적응을 유도한답시고 직접 뱀을 잡아와 가져다줄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런데 최근에는 이 공포증의 치료에 VR 기술을 활용하는 방안이 주목을 받고 있다. 환자에게 직접 공포 자극들을 상상해보도록 요청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자극의 현실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극의 제시를 오로지 환자의 생각에만 맡겨야 하므로 치료자의 입장에서는 환자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들여다보고 통제하는 것이 어렵다는 난점이 있다.
그런데 VR 기술을 통해 공포 자극을 안전하면서도 ‘리얼하게’ 구현할 수 있게 된다면? 이는 환자 스스로가 자극을 상상해내야만 하는 부담감을 낮추면서도, 자극의 현저성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치료 효과를 증진시킬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거듭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4차 산업혁명을 등에 업은 심리학이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게 될지 앞을 내다보기가 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새롭고 긍정적인 변화란 결코 저절로 따라오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젊은 심리학자들은 오늘도 부지런하게 인간 심리 탐구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하니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과연 심리학자들이 어떤 흥미로운 도약을 보여주게 될 것인지 여러모로 많은 기대를 품게 된다. 물론, 나 역시도 심리학을 다루는 한 사람으로서 나름의 새로운 역할들을 끊임없이 고민해 가야 하겠지만.
원문: 허용회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