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국회의원들이 모여서 남의 남편의 혼외자 의혹을 규탄한다. 이슬람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지난 주 한국에서 벌어졌다.
새누리당 중앙여성위원장 류지영 의원은 16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총장이 혼외자식, 즉 축첩 의혹이 있다는 구설수에 휩싸인지 일주일 이상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며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그들은 “이번 사퇴는 공직자 윤리의 문제이며 검찰의 독립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안”이라며 법무부장관의 감찰지시를 지원사격했다.
이제 채동욱 파문의 쟁점은 혼외자 진위 여부에서 벗어나 조선일보의 취재과정(개인정보입수과정)은 정당했는지, 보도과정에서 취재원에 대한 인권침해는 없었는지, 황교안 법무부장관의 감찰지시는 적절했는지, 청와대와 법무부간의 교감-지시는 없었는지 같은 것들로 옮겨가고 있다. 그런데 새누리당 중앙여성위원장의 기자회견은 이러한 논점들을 모두 무시한 채 오로지 채 총장의 외도(축첩?)의혹 규탄에만 집중했다. 다분히 정략적이다.
부녀자들이 단합해서 특정 남성의 외도를 규탄하는 건, 전형적인 간통죄 존치론자들의 행태다. 개인의 가정사를 국가가 나서서 감찰-규탄한다. 내가 한국에 파견된 외신기자라면 이건 무조건 해외토픽이다. 어제의 황당한 기자회견은 채동욱 파문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가부장제 집행자로 나타난 국가
한 일간지가 현직 검찰총장에게 혼외자가 있다는 의혹을 보도하자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언론이 진위를 가리려는 취재경쟁에 뛰어들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에 대한 감찰을 지시했고, 채 총장은 즉각 불쾌감을 드러내며 사의를 밝혔다. 파문이 일주일째 접어들자 ‘있다’ ‘없다’ 진실게임에 대한 성찰이 이어지면서 사건 초기 혼외자의 진위여부에 집중했던 언론들도 점차 이성을 찾고 있는 형국이다. 조선일보와 검찰, 법무부 장관, 청와대가 뒤엉켜 있는 이번 파문의 쟁점들을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조선의 취재과정(개인정보입수과정)은 정당했는가?
취재-보도과정에서 취재원에 대한 인권침해는 없었는가?
황교안 법무부장관의 감찰지시는 적절했는가?
청와대와 법무부-조선일보 사이의 교감-지시가 있었는가?
하지만 여기에 빠져있는 한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채동욱 사생아 문제에 대한 한국사회의 관심은 적절한 것인가?
알권리로 둔갑한 관음증
연예인들의 신변잡기와 시시콜콜한 가정사로 채워지는 저질 연예기사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이것들을 소비하는 대중의 존재때문이다. 고작 삼류 일간지의 폭로성 가십에 불과했던 채동욱 파문이 온 나라를 뒤흔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장 예민하게 보호받아야 할 개인의 가정사에 말초신경을 곤두세웠던 대중의 오지랖이 있었다.
‘혼외자’라 함은 말 그대로 제도결혼의 틀 밖에서 얻어진(?) 자녀를 말한다. 정상결혼이 규범으로 작동하는 가부장제사회에서 혼외자는 곧 불륜(외도)을 의미한다. 혼외자의 부모가 따가운 눈총을 받는 이유는 이것이 혼외정사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즉 비난의 실체는 혼외자라는 결과물이 아닌, 외도라는 과정에 대한 비난이다. 이런 측면에서 혼외자에 대한 비난은 제도결혼이라는 ‘성역’을 파괴한 것에 대한 가부장제의 응징이다.
한국의 정부가 가부장제의 응징을 직접 집행하고 나섰다. 14일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공개적으로 검찰총장의 가정사를 감찰하라고 지시했다. 놀랍다. 법무부 장관의 업무매뉴얼에 ‘검찰총장 가정사 감시’가 포함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국가에게 개인의 가정사를 감찰할 초법적인 권한을 부여한 것은 누구일까?
제도결혼의 벽이 공고한 사회일수록 혼외자에 대한 시선이 차갑고 반대의 경우일수록 혼외자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다. 94년 미테랑 대통령의 혼외자 보도에 대해 “그게 뭐”라고 되물었던 르몽드지의 쿨함 뒤에는 혼외자 비율이 50%를 넘는 프랑스사회의 가족문화가 있었다.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신생아의 50%가 제도결혼 밖에서(동거하는 부모) 태어나며, 아이슬란드 같은 나라는 혼외자 출생률이 65%에 이른다. 이런 사회에서 제도결혼이라는 가치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혼내-혼외 출생의 구분같은 것은 무의미하다.
반면 제도결혼을 금과옥조로 인식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혼외 출생에 대해 매우 ‘엄격한’ 나라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유교국가들과 이슬람권 국가들이 그렇고 서구국가들 중에서는 미국이 대체로 그렇다. 이런 차이는 가족의 형태에 대한 사회구성원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다양한 가족형태를 인정해야 한다’거나, ‘정상가족이데올로기를 타파해야 한다’같은 고매한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국의 검찰총장이 혼외자 의혹 한방에 나가떨어지는 상황의 촌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그게 뭐?”
이번 검찰총장 혼외자 논란이 새삼 말해주는 것은 한국이 지독한 가부장제 국가라는 사실이다. 혼외자 비율이 1.5%에 불과한 우리나라에서 그네들의 쿨함을 온전히 받아들이길 바랄 수는 없다. 그러나 가부장적인 사회분위기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 국가의 폭력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대중의 말초적인 호기심이 가부장제와 만나자 개인의 가정사도 아주 간단하게 ‘알권리’로 둔갑한다.
원시부족사회를 방불케하는 오지랖에 숨이 막혀온다. 검찰총장에게 혼외자가 있든 없든 외계인 자녀가 있든 그런 가정사를 사회일반이 공유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대중의 호기심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정략적으로 활용하는 언론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런 비난은 조선일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있다 없다’ 진실게임에 참여했던 모든 언론에게 책임이 있다. 사건 초기 조선에 맞서 열정적으로 채동욱 총장의 무고함을 증명하려했던 언론들 역시 같은 종류의 책임을 느껴야 한다. 처음 조선이 의혹을 제기했을때 다수 언론이 “그게 뭐”라고 일축했다면 어땠을까?
한국의 모든 언론이 그렇게 구질구질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혼외자 보도에 대해 “그게 뭐”라고 비웃었던 매체가 있었다. 놀랍게도 이번 파문을 몰고 온 당사자 조선일보다. 2009년 한 장관의 혼외자 문제가 불거지자 조선은 “그래서 어떻다는 말이냐”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쿨한 대인의 풍모를 과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조선일보의 대응은 비열한 가정사폭로에 대처하는 언론의 모범답안에 가깝다. 그렇게 쿨~했던 조선일보가 곤경에 처한 것 같다. 한 매체가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이 4남 2녀의 혼외자녀를 두고 있음을 폭로한 것이다. 보도의 적절성을 떠나, 조선일보가 그때의 쿨함을 계속 견지할 수 있을지 궁금한 대목이다.
21세기형 명절예절 ‘오지랖 관리’
우리나라와 같이 제도결혼의 권력이 강력한 나라에서는 혼외자를 공개하는데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더욱이 그것이 유명인일 경우 ‘가부장제 파괴범’으로 십자가에 매달릴 각오를 해야 한다. 제도-비제도 결혼을 떠나 배우자의 외도를 옹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비난은 가정안에서 이루어져야하며, 이를 응징할 자격도 오직 배우자에게 있다.
매우 예외적으로 법원이 그 자격을 가진 나라도 있다. 국가가 사회구성원의 성도덕을 규제하는, 이른바 ‘간통죄’다. 이슬람권을 제외하고 간통죄가 남아있는 나라는 한국과 대만이 유이하며, 이제 한국에서도 간통죄폐지 논의가 전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간통제가 존폐의 기로에 놓여있는 이시대에 공무원의 혼외자 의혹에 대해 감찰지시를 내린 국가의 모습은 너무나 우스꽝스럽다. 어제는 대통령까지 나서서 “채동욱 감찰지시는 당연한 것”이라며 채동욱 총장에 대한 감찰지시를 내린 법무부장관을 옹호했다. 청와대는 온 국민이 채동욱 부인으로 빙의하길 바라는 것일까?
혼외자와 같이 민감한 개인사는 가장 예민하게 보호받아야 할 프라이버시의 영역이다. 개인의 가정사가 ‘공직윤리’, ‘알권리’란 말로 둔갑해 파헤쳐지는 것은 엄연한 폭력이다. 굳이 ‘아동인권’이나 ‘취재원 보호’같은 규범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가정사에 대한 범국가적 오지랖은 그 자체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나와(당신과) 일면식도 없는 그의 가정에서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혹은 일어나지 않았는지에 대해 내가(당신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설사 그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한들 나는(당신은) 그 가정의 일에 간섭할 자격이 없다.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조선의 유치한 폭로를 대중이 외면했더라면 법무부장관이 업무규정에도 없는 감찰지시를 내릴 수 있었을까? 언론이 도깨비시장같은 진실게임을 벌일 수 있었을까? 결국 채동욱을 쫒아낸 것은 박근혜도 황교안도 아닌 대중의 오지랖이다.
이제 명절이다. 명절에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예절이 있다면 ‘오지랖 관리’가 아닐까 싶다. 오지랖을 관리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상대가 불편해할만한 참견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내 주변사람의 사생활이든 고위공직자의 사생활이든 달라야 할 이유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원칙을 생각한다면 명절날 집집마다 열리는 ‘오지랖 경연대회’가 조금은 덜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