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우울증 환자일 때, 우울증은 더는 병이 아니다
행복(긍정) 강박, 모방(매뉴얼) 강박 등은 현대사회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징후이다. 자기계발은 사회의 병리적인 징후에 따라 그 방향을 전환하여 왔다. 가령 이는 대공황과 우울증의 연관에서도 잘 드러난다. 정신적 위기인 우울과 경제적 위기인 불황이 ‘디프레션(depression)’이라는 동일한 단어로 불리게 된 것은 20세기 초반의 장기불황과 대공황기부터였다. 불황의 시대는 곧 우울증의 시대인 것이다.
이제 우울증은 우리 사회의 정신 건강 분야에서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경제 위기가 세계를 뒤덮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둘 다 장기 지속이 예견되고 있다. 가령 세계보건기구는 2020년이 되면 우울증이야말로 심신 양면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될 것으로 내다본다. 최근 보건복지부가 가벼운 우울증 환자들을 법률상 정신병 환자에서 제외하기로 한 이유는 간단하다. 다수가 외눈일 때, 외눈은 더 이상 장애가 아닌 것이다.
자기계발과 심리 치유
사회와 정신의 이러한 상관성 때문에 심리학과 자기계발의 지평 융합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유의미한 문화적 영향을 미친다. 크게 두 가지의 측면(심리적 치유와 자아의 재구성)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심리학과 자기계발의 만남은 심리 치유의 전망(위로, 포용, 회복 등)을 자기계발 안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만든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의문의 여지없이 개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얹어놓는다. 사회가 져야 할 짐까지 모두 전가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최소국가론과 더불어 국가의 기업화를 주장한다(시민의 안녕을 위해 존재하기에 적자도 감수해야 할 공기업에게 효율적 운영을 통한 흑자를 요구하고, 민영화를 촉구한다). 국가와 기업의 부담은 줄이면서 개인의 부채는 증가시킨다. 가령 학생들에 대해 정부는 대학 등록금을 감액 혹은 면제해주기보다 학자금 대출을 유도하고, 무주택자에 대해서는 임대료를 보조해주기보다 주택담보대출의 비율을 상향 조정하려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은 결국 과다채무와 무한책임(경쟁)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비정상적 사회구조가 정상 작동하도록 만들기 위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의 대타자는 현대인을 자기계발의 주체로 호명한다. 자기계발의 주체는 부정적인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을 현실로 긍정한다. 신자유주의는 이 주체로 하여금 흡사 시시포스마냥 자기계발의 짐을 껴안고 정상을 향해 끝없이 올라가도록 시킨다.
“정상에서 만납시다.” 지그 지글러의 친절하고 도전적인 말씀이다. 그러나 정상에서 만나자는 말씀은 공허한 이상에 불과하다. 현실은 끝없는 책임과 처절한 경쟁 속에서 신음하는 개미지옥이기 때문이다. 결국 서로를 짓밟고 위로 올라서게 만드는 극악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프레임, 즉 인식의 틀을 지배하기 위한 새로운 장치가 필요하게 된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계발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고통을 위무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즉 자기계발이 병도 주고 약도 주는 상황이다.
청춘이라 아픈 게 아니라 신자유주의라 아프다
치료적(심리적) 패러다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으로 김난도의 저작(『아프니까 청춘이다』)을 꼽을 수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란다. 이 멋들어진 제목의 책은 중국에서도 급속하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현재 자본주의가 가장 신속하게 확산되고, 그 병폐(양극화) 또한 두드러지는 곳에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우기려면, 교양(성장)소설이 상정하는 안정된 근대적 세계관이 정상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88만원 세대』가 주목한 바와 같이 세대 갈등을 통해 계급 갈등이 재현되는 곳이다. 단지 청춘이어서 아픈 것이 아니다. 이제 더 이상 개인의 실존(과 그 의미)을 고민하는 청춘은 없다. 자아와 세상의 대등한 통합을 모색하는 청춘도 없다. 그들의 자아는 세상 앞에 맞설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 안으로 어서 편입하고 싶어 안달하는 겉늙은 청년들만 있을 뿐이다.
돈이 없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가 아픈 이유는 청춘이라는 아름다운 세대에 속해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망령이 배회하는 아름답지 못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령 유럽에는 ‘천 유로 세대’라는 표현이 있다. 여기에서 1,000유로는 생존을 기초 비용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천 유로 세대’란 1,000유로, 즉 월 100만 원 조금 넘는 소득을 가지고 집세는 물론, 각종 세금과 생활비까지 부담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유럽의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신조어이다.” 또한 미국에는 ‘빈털터리 세대’가 있고, 마찬가지로 일본에는 ‘버블 세대’가 있다.
중년은 아플 수도 없다
그나마 청(소)년의 고통은 낭만적 포장이 허용된다. 아프니까 청춘이고, “아프니까 사춘기다”. 하지만 중년은 아플 수도 없다(『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 한 면으로 가족의 생계가 가장의 어깨 위에 걸려 있고, 다른 한 면으로 건강과 재정의 관계가 긴밀하기 때문이다. 봉합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잘린 손가락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미국의 현실에 비해서는 양호하다지만, 암과 같은 난치병의 발병이 가계 빈곤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은 다를 바가 없다. 이러니 아플 수도 없고, 힘들 수도 없다.
1997년 MBC <창작동요제> 입상곡을 다들 기억하실 게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왜? 오늘따라 우울해 보이는 아빠의 얼굴 때문이란다. 무슨 동요가 아이로 하여금 아빠의 안색을 살피게 하는 건지. 이 동요를 들으면 힘이 나긴 고사하고, 외려 참담(비장)해진다. <아빠 힘내세요>가 IMF 금융위기 당시에 유행했던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가장들에게도 한국사회는 가혹하기 그지없다.
이렇듯 청춘은 아파하고, 중년은 아파서도 안 된다. 현실이 이리도 엄혹하기에 청년과 장노년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다들 버거운 짐으로 신음하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상품이 바로 치유적 성격이 강한 심리학적 자기계발서이다. 심지어 방송계에서조차 <오프라 윈프리 쇼>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는 <힐링 캠프>가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는 이 험난한 생활 전장으로 뛰어들기 위해 응급처치로 사용되는 진통제일 뿐이다. 즉 내 영혼의 모르핀 주사이다.
이는 결국 자기계발의 심리학적 전화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자기계발이 심리학의 언어로 갈아탔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로 포획되는 자기계발적 주체는 계급투쟁의 주역으로서의 사회적 성원이 아니라, 체제 유지의 도구로서의 심리적 개인일 뿐이다. 자기를 계발하는 주체가 바로 내면에 천착하는 주체인 것이다. 모든 문제를 내면의 차원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불교풍 ‘힐링’ 서적의 흥행도 마찬가지
이러한 맥락에서 명상적 자기계발서의 흥행 또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불교의 약진이다. 2012년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는 혜민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정목의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 법륜의 『스님의 주례사』등 승려들의 책이 많았다. 이들이 출간하는 에세이들은 종교적 색채를 지운 유연한 접근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치유와 위무, 그리고 휴식을 제공한다.
이의 흥행을 진보 정치의 한계와 좌절로 인한 피로감으로 분석하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정당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심화에 따른 피로감에 기인한다고 봐야 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영어권에서 불교적 명상서가 선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이라고 상황이 다르겠나. 가령 『생각 버리기 연습』의 저자 코이케 류노스케의 거의 이십여 권에 달하는 국역서들을 보라. 그가 부각되는 이유에는 물론 도쿄대 출신의 젊고 준수한 승려라는 것도 포함되지만(학력자본+외모자본), 절과 카페를 겸한 ‘iede cafe’를 개원하여 대중의 곁에 편안하게 다가오는 방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독자의 마음을 다독이는 소박한 메시지와 소탈한 접근 방식이 그의 힐링 사역使役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위의 글은 이원석의 신간 <거대한 사기극: 자기계발서 권하는 사회의 허와 실>의 2장 ‘자기계발의 담론’ 중 ‘자기계발과 심리학: 힐링 강박과 자아의 재구성’을 재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