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읽는 창으로서의 과학, 『김상욱의 과학공부』
지인들로부터 아직도 놀림을 당한다. 몇 해 전 우연히(?) 출간한 책 제목 때문이다. 질문은 다양하지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정말 외로울 때 과학책 읽어?”, “과학책 읽으면 이해는 해?”
우선 첫 번째 질문의 답. 외로울 때 책을 읽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책 읽으면 외로움이 덜하다. 읽는 책은 대체로 과학책이 많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과학책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시간이 더 걸리니까). 두 번째 질문의 답. 읽어도 대부분 이해 안 된다. 생각해보라. 책 몇 권 읽는다고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물리법칙과 수학 공식을 이해한다면 과학자나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누가 고생을 하겠나.
물론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왜냐, 폼이 안 나니까. 그래서 정말 외로울 때 과학책을 읽냐고, 과학책 읽으면 이해하냐고 누가 물으면 짐짓 표정을 고쳐 잡고 이렇게 말한다.
“무슨 책을 읽은들 외로움이 채워지겠습니까?”
“이해하고 답을 찾으려고 읽나요, 질문을 찾으려고 읽지.”
열역학 제2법칙은 왜 교양이 아닌가?
이 책도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교양이라는 관점에서 과학과 인문학은 평등한가? 답은 ‘아니오’다.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강조하는 시대, 과학과 인문학의 불평등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평등하지 않으면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논하기 전에 과학을 교양의 대열에 합류시키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학문의 융합, 문·이과의 통합이 요즘 교육의 화두다. 하지만 교양이라는 관점에서 과학과 인문학은 그동안 평등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과학을 교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함께 가기 위해 평등해야 한다. 과학은 교양이다.
– 본문 중
저자의 이런 선언은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종의 아포리즘으로 읽힌다. 과학이 교양으로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저자가 선택한 전략은 글쓰기다. ‘철학 하는 과학자, 시를 품은 물리학’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든다.
또 하나의 전략은 ‘당연한 것’에 대한 질문이다. 저자는 묻고 또 묻는다. 왜 과학자에게는 항상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달라고 요구하는가? 셰익스피어는 교양이지만, 열역학 제2 법칙은 왜 교양이 아닌가? 미적분을 왜 어렵다고 하는가? 한 편의 시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왜 하나의 물리법칙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가?
과학은 결국 인간과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그래서 ‘과학적이다’라는 말은 ‘인간적이다’의 이음동의어로 읽힌다. ‘비과학적이다’는 ‘비인간적이다’라는 말과 같다. 과학은 단순한 지식 그 이상이다. 합리적으로 세상을 보고,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와 해답을 찾는 일이다. 과학적 사고방식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저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철학 한다는 것은 신화와 동요를 걷어내는 것, 자연 그대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연을 이해하는 것을 과학이라 한다. 이렇게 과학은 철학이 된다. 과학은 신화와 동요를 고발하고, 권력을 거부한다. 결국, 과학은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질문을 찾기 위한 과학책 읽기, 과학 공부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1장은 ‘과학으로 낯설게 하기’. 하루, 행복, 스마트폰, 역사 등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상도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달리 보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익숙한 세상을 낯설게, 다르게 보는 방법을 통해 과학적 사고로의 첫걸음을 내디딘다.
“과학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낯설어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상을 만들고 그 상상이 마치 실재하는 양 믿는 동물이다. 역사 이래 인간은 신화 속에 살아왔고 또 살고 있으며, 이는 자연을 제대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일부러 낯설게 보는 것이야말로 과학의 첫걸음이다.”
2장은 ‘대한민국 방정식’. 최근 2~3년 동안 국내에서 벌어진 굵직한 사건 사고를 과학에 빗대어 분석했다. 저자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신화와 공포에 주목한다. 비과학적인 것은 결국 비인간적인 것이다. 저자가 “쓸거리가 너무 많았다”고 하소연(?) 하는 대목을 인터뷰에서 본 적 있다. 그만큼 비과학적(비인간적)인 일이 많았다는 얘기다.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에도 ‘만들어진’ 신화와 동요가 있다. 철학 한다는 것은 그것을 고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과학도 고발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모른 척하는 과학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니다. 철학은 더욱 아니다.
3장은 ‘나는 과학자다’. 주로 양자역학에 관한 이야기다. 또 다양한 물리학 주제를 다뤘다. 동시에 과학자가 정치나 권력, 경제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과학계를 향한 쓴소리도 담겨 있다. “과학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과학자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라면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과학자인가?’라고 말이다.” 스스로 ‘나는 과학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과학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4장은 ‘물리의 인문학’이다. 소설 『레 미제라블』로 엔트로피 법칙을 해석하고, 방정환의 『형제별』이라는 시를 통해 별과 우주를 설명한다. 부제에 걸맞게 인문학적 질문에 관한 해답을 물리학적으로 찾는다. 궁극적인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인류의 본질적 질문에 저자는 ‘우주’에서 답을 구한다. “과학자도 당연히 인간이다. 그들도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한다. 과학이 인문학과 만날 기회가 항상 있었다는 말이다. 실제로 물리학이 인문학적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시인과 과학자는 ‘탄광의 카나리아’
거의 20년 전 일이네. 내가 무얼 연구하는지 막스 플랑크가 물은 적이 있지. 그래서 내 마음속에 막 떠오르기 시작한 일반상대성이론의 뼈대에 관해 설명해 주었네.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더군. ‘선배로서 하는 말인데 그런 연구는 하지 말게나. 왜냐하면, 우선 자네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고, 설령 성공하더라도 아무도 자네를 믿지 않을 걸세.’
-아인슈타인(책 본문 중에서)
과학을 한다는 것, 과학 공부를 한다는 것은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해보면 지인들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 (과학)책 읽었다고 하지 말게나. 왜냐하면, 우선 자네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설령 이해하더라도 아무도 자네를 믿지 않을 걸세.”
시인을 가리켜 ‘탄광의 카나리아’라고 한다.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절, 광부들은 탄광에 들어갈 때 카나리아를 데리고 갔다. 카나리아를 보고 작업을 계속할지, 탈출할지를 결정했다. 카나리아는 이산화탄소에 민감한 새다. 공기가 부족하면 카나리아가 먼저 반응한다. 시인을 가리켜 ‘탄광의 카나리아’라고 하는 것은 이 사회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용서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고 납득할 수도 없는 상황에 대하여 치가 떨리고 노여운 것은, 상황 그 자체보다는 그 배후에 도사린 잘못된 태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릇됨을 응축하고 있는 자세, 그것을 볼 줄 알 때에 우리는 분노하며 운다.
– 김소연 시인의 ‘분노’ 중
과학자도 그래야 한다. 무릇 과학 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회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김상욱의 과학공부>는 그 민감한 반응의 결과물이다. 과학자가 날카로운 촉수를 세울 때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목격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그런 촉수가 없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답답할 때 과학책을 읽는다.
원문: 책방 아저씨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