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이 글은 채동욱 검찰총장의 사임 전 작성되었으나, 채동욱 검찰총장의 사퇴 배경을 잘 그리고 있어 재게재합니다. 원문은 다람쥐주인의 방에서 볼 수 있습니다.
2005년의 황교안: 검찰의 시대착오전 색깔론
“장관이 피의자 구속 여부에 대해 구체적인 수사지휘권을 행사한 것은 검찰의 중립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매우 충격적인 일로서 그간 검찰이 쌓아온 정치적 중립의 꿈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2005년 수사지휘권파동으로 물러난 김종빈 검찰총장의 이임사중 일부입니다. 그해 동국대 강정구 교수는 “6.25 전쟁은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는 내용의 칼럼을 모 인터넷 매체에 기고했습니다. 검찰이 그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수사하려하려 했습니다.
이에 당시 천정배 법무부장관은 검찰에 대해 수사지휘권을 발동해 불구속수사를 지시했고, 검찰이 이에 대해 강력하게 맞서면서 초유의 수사지휘권파동이 일어났습니다. 법무부장관이 검찰에 수사지휘권을 행사한 것은 건국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달리하는 사안입니다. 당시 진보진영은 검찰의 시대착오적인 색깔론을, 보수진영은 공개문서를 통해 검찰에 수사지휘권을 행사한 천정배 장관의 행동을 비난했습니다.
2005년 수사지휘권파동의 원인을 제공했던 인물이 바로 황교안 현 법무부장관입니다. 당시 강 교수를 구속수사하겠다는 검찰의 방침에 대해 시민사회에서는 “매카시즘을 동원한 학문·사상 연구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비난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서울중앙지검 2차장으로 강정구사건을 수사하던 황교안 검사는 강 교수를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혐의로 구속 수사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이를 지켜보던 천정배 장관은 끝내 수사지휘권을 발동했습니다.
2013년의 황교안: 이제는 반대 입장에서 국정원을 지켜라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겨레> 보도에 의하면 국정원의 대선 여론조작 및 정치개입 의혹 사건을 수사중인 검찰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해 국정원법 위반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모두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으나,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지 말라며 1주일 동안 영장 청구를 막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대검찰청이 지난달 27일 검찰이 중간수사결과로 원세훈 원장 형사처벌 방안을 법무부에 보고하자 황 장관은 ‘원 전 원장에 대해 공직선거법 적용은 안 된다’며 압력을 행사했고, 이에 대해 채동욱 검찰총장은 ‘수사팀 의견은 절대 바꿀 수 없다’며 팽팽히 맞선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공개문서와 구두라는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이번 황교안 법무장관과 vs 채동욱 검찰총장간의 갈등은 2005년의 수사지휘권파동과 양상이 같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었습니다. 2005년 법무부장관의 수사지휘권행사에 맞서던 공안검사가 이제는 반대의 입장이 되어서 검찰을 압박하는 묘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천정배 전 장관이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볼지 무척 궁금합니다.
국가보안법 해설서를 쓴 공안통 황교안 VS 전두환을 감방에 넣은 특수통 채동욱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대검찰청 공안1·3과장, 서울지검 공안2부장을 거쳐 공안분야를 총괄하는 2차장검사를 지낸 대표적인 ‘공안통’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1998년 국가보안법 해설서를 펴낼 정도로 공안수사에 정통하며, 별명이 ‘황공안’일 정도로 뼛속까지 공안검사라는 것이 그를 바라보는 일관된 평가입니다.
이에 반해 채동욱 검찰총장은 검찰 내 대표적인 ‘특수통’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1995년 서울지검 강력부 재직 당시 대검 중수부의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 수사팀에 차출되어 전두환 씨의 12·12 군사반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사건의 검찰 논고문을 작성하면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2003년에는 굿모닝시티 분양 비리를 파헤쳐 집권 여당이던 민주당 정대철 대표를 구속했고, 2006년에는 중수부의 현대차 비자금 사건을 맡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을 구속했으며, 대전고검장으로 재직하던 2010년에는 ‘스폰서 검사’ 진상조사단장을 맡아 전·현직 검사들을 상대로 조사를 지휘하는 등 굵직굵직한 수사를 맡아오면서 엄정함을 지켜왔다는 평이 주를 이룹니다.
본래 공안(公安)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공공의 안녕과 질서’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공안’이란 말은 공공의 안녕과는 무관한 ‘정권의 안녕’을 의미하는 말로 받아들여집니다. 공안검사가 법무부장관이 되었으니 그가 정권의 안녕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공안통’ 황 장관에 맞서 맞서 ‘특수통’ 채동욱 총장이 검찰의 자존심을 지켜낼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원세훈 혐의 왜 중요한가?
이제 원세훈 전 원장은 혐의가 무엇이든 사법처리를 피할길이 없습니다. 어차피 구속 될 인물이지만 그가 받게 될 혐의가 무엇일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원 원장의 혐의가 국정원법 위반에 국한된다면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승인받는 꼴이 됩니다. 이 경우 이명박 전 대통령의 책임은 물론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에 미칠 영향에까지 단단히 바리케이트를 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검찰이 원 원장에게 국정원법 위반은 물론 공직선거법 위반혐의까지 함께 적용한다면 사건의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검찰이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을 승인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성은’을 입은 황 장관이 이를 기꺼워할리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황 장관의 입장에서 현 정권에 미칠 국정원게이트의 파장을 차단하려면 원세훈 원장의 혐의를 국정원법 위반 정도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깔끔합니다. 그러나 원 전 원장의 지시에 따라 국정원 심리정보국 직원들이 수백 개의 아이디를 동원해 1만여건의 대선개입 관련 게시글·댓글을 달아온 사실이 확인된 이상 수사의 책임을 맡고 있는 검찰은 황 장관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수사의 역풍을 직접 감당해야 할 채동욱 총장과 행정부에 몸담고 있으면서 정권의 방패막이를 자처하고 있는 황교안 장관은 수사를 바라보는 입장이 이렇게 다릅니다.
삐뚤어진 충정 용납말아야
채 총장 역시 황 장관과 마찬가지로 박근혜 대통령의 임명을 받은 인물이며, 정권의 비위를 거스른 적이 없는 역대 검찰총장들의 전례로 볼 때 그가 밝힌 수사의지를 온전히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둘의 갈등관계에서 ‘악인’의 역할을 맡은 것은 황교안 장관 쪽이라는 것입니다.외부(정권)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검찰의 소신을 지키겠다는 채 총장의 뜻은 분명 선의(善意)로 비춰지며, 이에 대해 ‘외압’역할을 맡은 쪽은 황 장관입니다. 이처럼 선악구도가 선명하게 갈리는 갈등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안팎의 강한 반발을 무릅쓰고 공안검사를 법무장관에 임명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목적이 이것이었을까요? 검찰수사에 대한 황 장관의 외압사실이 전해진 뒤 법조계와 사민사회에서 황 장관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그의 임기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온 나라에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판국에 국정원의 대선개입사실을 부정하려 하는 황 장관의 태도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아둔함입니다.
황 장관의 어긋난 충정은 오히려 국정원사건 수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분노를 되살리고 있으며, 부글부글 끓고 있는 여론은 정권퇴진운동으로 번질 조짐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엄정수사를 천명한 채동욱 총장의 어깨에 힘이 실리는 모양새입니다. 박근혜 정부에 더 이상 황 장관과 같이 ‘오판’을 하는 각료가 없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