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6일 넷플릭스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블로거/인플루언서/전문매체를 대상으로 싱가포르에서 미디어 시사 행사를 가졌다. 11월 중순 공개 예정인 마블 드라마 시리즈 ‘퍼니셔(Punisher)’를 선공개하는 자리였다. 행사 이름은 ‘Stay Home. Sign In. Binge on’. 한국어로 옮기자면 ‘집에서. 로그인. 정주행’쯤 될까?
정작 이 행사에 초대된 사람들은 개고생이었다. 전날 저녁 비행기 타고 싱가포르 도착하니 자정. 행사는 다음 날 오전 10시에 시작해 저녁 8시까지 이어졌다. 시작부터 끝까지 10시간. 아무리 시차가 1시간밖에 안 된다고 해도 지친다. 답답했던 건 중간에 휴식 시간을 3시간이나 끼워 넣었다는 점. 다음날 낮에 바로 돌아가야 하는데. 쭉 이어서 했으면 진작 끝나고 쉬었을 텐데. 굳이 왜 밤까지 늘려놓은 걸까. 이유가 있다.
넷플릭스는 ‘근거’를 가지고 일하는 문화를 가진 회사다. 근거 없이 일하는 회사가 어디 있겠냐 반문하겠지만, 에이, 다들 알면서. 감으로 일하는 회사 참 많다. 한국만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많다. ‘데이터 기반 경영(data driven management)’이란 말이 달리 신조어겠는가. 다들 데이터를 깔아뭉개면서 일하니까, 데이터를 바탕으로 일하는 게 새롭게 나타난 거다. 넷플릭스는 그 반대다. 데이터로 바닥을 다진다. 데이터에서 나온 인사이트로 설계해, 사업이란 건물을 올린다.
유저 인터페이스 혁신 담당 크리스 제피(Chris Jaffe) 부사장은 사용자 환경 중심에 TV가 있다는 걸 설명했다.
“넷플릭스는 사용자 활동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능을 만든다. 일단 일부 사용자에게 그 기능을 시험 삼아 써보도록 한 후, 반응이 좋으면 그걸 모든 유저에게 보낸다.”
이렇게 철저히 데이터에 의존해 만든 기능도 생존율은 절반 남짓이라고 했다(그러니 이승환 수령은 부동산 콘퍼런스 실패에 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입 후 반년 지나면 넷플릭스 사용자 60%가 TV로
넷플릭스가 애먼 휴식 시간 3시간을 넣어가며 긴 일정을 잡은 이유는 이거였다.
“실제 가정에서 보는 환경과 비슷한 경험을 주기 위해서.”
아태 지역에서 집 TV로 넷플릭스를 보는 시간대는 일반적으로 저녁 시간대라고 지역 홍보 담당자가 말했다. 근거는 각 국가 활동 지표다. “음. 보통 다들 TV 그때 보지 않나”라고 생각하셨다면, 맞다. 그렇다. 당연히 그러려니 하는 생각도 이 회사에서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검증 대상이다. 넷플릭스가 사용 데이터로 파악한 아태 지역 사용자는 이렇다.
- 넷플릭스를 여러 기기에서 본다. 스마트폰, 태블릿, PC, TV 등 3~5개다.
- 스마트폰은 낮에, 짧게, 우연히 보고 TV는 밤에, 길게, 목적을 가지고 본다.
- 스마트폰이나 PC에서 가입하더라도, 반년이 지나면 60%는 TV를 주 시청 기기로 삼는다.
TV 부분에 주목해 보자.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라는 카테고리에 같이 속한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차이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확한 숫자는 나온 적 없지만 유튜브 사용자는 주로 모바일에서 유튜브를 본다. 2016년 매셔블 기사를 보면 설문 조사에 응답한 유튜브 시청자 50%가 “TV로 유튜브를 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본 적은 있다’는 사람조차 50% 남짓이란 얘기다. 넷플릭스(아태 지역 기준)는 60%가 TV를 주 시청 기기로 쓰는데 말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간단히 따져보자. 유튜브 크리에이터는 취미로 영상을 만들다 인기를 얻은 ‘일반인’이 많다. 넷플릭스 크리에이터는 영상으로 밥 먹고 사는 전문가(a.k.a.영화감독)가 절대다수다. 유튜브는 영상 길이를 15분으로 제한하다 2011년에서야 제한을 풀었다. 넷플릭스는 애초부터 시간제한이 없다.
두 서비스는 태생부터 다르다. 유튜브는 일반인이 영상을 올려 공유하는 서비스다(비즈니스 인사이드에 따르면 재닛 잭슨이 슈퍼볼 공연 중에 가슴이 노출된 영상을 공유할 방법을 찾다가 떠오른 서비스란 얘기도 있다). 넷플릭스는 DVD 우편 대여 서비스였다. 넷플릭스는 처음부터 영화를 보는 서비스였다. 그렇다. 넷플릭스 사용자는 ‘영화’란 단어로 대표되는 고품질 영상을 보기 위해 넷플릭스를 쓴다. 그래서 모바일에서 가입한 사용자도 점차 가정에서 가진 가장 큰, 가장 좋은 화면을 찾아 TV로 옮겨간다.
‘퍼니셔’ 선공개 행사장은 LG전자 OLED 최상위 모델(돌비 비전 대응)과 다 채널 스피커(돌비 애트모스 대응)로 가득 찼다. 가정에서 구현 가능한 최고 엔터테인먼트 환경을 맞춘 거다. 보통 스트리밍 서비스는 블루레이 디스크 등 고정식 매체에 비해 화질이 떨어지는 걸로 여긴다. 아무래도 전송 데이터양 자체가 부족하니까. 하지만 이날 행사는 오히려 넷플릭스가 그 어떤 다른 매체보다 더 뛰어난 영상을 보여줄 수 있는 플랫폼이란 걸 각인시키려 작정한 모습이었다.
11월 중순 독점 공개 예정인 마블 오리지널 시리즈 ‘퍼니셔’는 돌비 비전, 돌비 애트모스를 모두 지원한다. 돌비 비전은 영상에서, 돌비 애트모스는 음향에서 현재 상용화된 포맷 중에서 최고 품질을 자랑한다. 연말 공개 예정인 영화 ‘브라이트(Bright, 주연 윌 스미스)’ 역시 마찬가지다. 넷플릭스 직접 제작 작품은 대부분 영상과 음향에서 최고 수준을 좇는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A/V(Audio/Video) 전문지 오디오 매거진 이현준 대표는 “넷플릭스가 영상과 소리에서 기존 플랫폼과 차이를 벌리려고 작정하고 만든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실제 시사 내용 중에는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깜깜한 밀폐 공간 속 액션 씬, 어두운 도로에서 총격전 등 초고해상도(UHD), 광색역폭(HDR, High Dynamic Range)의 장점이 드러나는 장면이 다수 포함됐다.
TV 시장 급변기, 고품질 영상 직접 제작으로 맞서
넷플릭스는 왜 직접 제작에 나서가면서까지 고품질 영상을 밀어붙일까. 아직 사용자 절대다수는 해상도도 색상 표현 능력도 그보다 한참 부족한 HD TV를 쓸 텐데. 공식 대답이 나온 건 아니지만, 해답은 지금이 가정용 영상 기기 시장의 일대 전환기라는 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TV는 크게 변화하고 있다. 화면의 세밀함은 고화질(HD)에서 초고화질(UHD)로, 색상 표현 능력(Dynamic Range)은 일반 색역폭(sRGB)에서 광색역폭(HDR)으로 바뀐다. 음향 역시 왼쪽과 오른쪽만 표현 가능한 2채널에서 전후좌우위아래를 모두 표현할 수 있는 7.1채널 이상으로 바뀌고 있다. 이 정도 변화는 아날로그 브라운관 일반 화질(SD)에서 평판 액정 고화질(HD)로 넘어온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나 TV에 영상을 공급해야 할 방송사는 아직 이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지상파 방송 3사는 지난 5월 UHD 방송을 시작했지만 아직 변변한 UHD 콘텐츠가 없다. 다른 나라 방송사 사정도 대동소이하다. TV 표현 기술은 발전했지만 이걸 즐길만한 콘텐츠는 없는 빈 곳이 생긴 상황이다. 이 공간을 빠르게 채우고 있는 것이 바로 넷플릭스다.
넷플릭스 사상 첫 오리지널 드라마로 유명한 ‘하우스 오브 카드’는 드라마 사상 처음으로 모든 화를 UHD(4k)로 촬영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는 넷플릭스가 무려 600억 원 제작비를 대준 거로 유명하다. 넷플릭스 최초로 고화질 포맷 돌비 비전과 고음질 포맷 돌비 애트모스를 적용한 작품이기도 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블레임’ 역시 돌비 비전, 돌비 애트모스를 적용했다.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해 “괜찮은 영상을 보려면 당연히 넷플릭스를 써야 한다”는 개념을 사람들의 뇌리에 박아가는 중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뛰어난 영상으로 유명하지만 넷플릭스에서는 당분간 볼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는 2014년 인터스텔라 개봉 후 한국 기자들과 만나 “필름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컬러, 이미지, 해상도 모든 부분에서 디지털보다 필름이 더 좋기 때문이다. 필름보다 더 좋은 매체가 나오기 전까지는 필름을 계속 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제 6K 디지털카메라 등장과 후처리 기술 표준 발달로 컬러, 이미지, 해상도 모든 부분에서 디지털이 필름을 앞서지만, 그는 여전히 필름에 집착한다.
넷플릭스와 방송사, 제조사 사이의 변곡점
TV 제조사와 방송사는 어떤 마음으로 넷플릭스를 보고 있을까. HD 시대 변화를 이끈 건, 당연하게도, 방송사였다. 방송사 이외에는 달리 콘텐츠를 대량으로 만들어 대량으로 배포할 플랫폼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조사들에게도 당연히 방송사와 협업이 중요했다. 잘 만든 HD 콘텐츠가 늘어나야 HD TV가 잘 팔릴 테니 말이다. 양측의 사이는 둘도 없이 돈독했다.
이제는 넷플릭스가 있다. 넷플릭스는 제조사와 함께 ‘넷플릭스 대응 TV’란 걸 만든다. 문자 그대로 넷플릭스를 편하게 볼 수 있는 TV인데 리모컨에서 버튼 하나로 넷플릭스를 실행해 볼 수 있게 돼 있다. 물론 이런 TV는 예전부터 만들 수 있었다. 리모컨에 버튼 하나 넣는 게 기술적으로 어려울 리 없다. 다만 여태까지는 넷플릭스를 편하게 볼 수 있는지 여부가 판매에 큰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하지 않았고, 넷플릭스와 경쟁 관계에 있는 유료 방송(케이블 TV) 사업자들이 더 셌을 뿐이다. 넷플릭스와 방송사, 제조사 사이 관계의 변곡점을 보는 기분이었다.
기업에게 변화는 위기이자 기회다. 변화의 폭과 깊이가 클수록 기존 강자에게는 위기가 된다. 도전자에게는 기회가 된다. 변화에 잘 대응하는 쪽은 성장한다. 누구나 아는 얘기다. 여기에 하나 더. 변화에 대응하는 걸 넘어 변화를 주도한다면 어떻게 될까. 역시 누구나 아는 얘기다. 애플.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그리고 어쩌면, 지금부터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