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고 비판하다가도 항상 귀결은 “돈 많으면 한국이 살기 최고야”라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실제로 외국에서 살아보니 이 말은 정말 100% 맞다. (미리 사과하지만, 수도권만 살아봐서 지방은 어떤지 모르겠다. 적어도 한국 수도권은 돈만 많으면 최고다.)
한국만큼 돈 많으면 살기 좋은 나라는 없다. 왜 그럴까? 필자의 독일 및 유럽 생활을 토대로 그 이유를 분석해보았다.
돈 많으면 한국이 살기 좋은 이유
1.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천상의 맛, 한국 음식
독일에 살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음식처럼 맛있고 다양한 음식도 많지 않다. 유럽의 맛부심 국가 이탈리아, 스페인 외국인 친구들도 한국 음식 (특히 코리안 바베큐)에는 사족을 못 쓴다.
거기다 식당들의 무한 경쟁으로 최고의 맛집만 살아남는다. 돈만 많으면 맛집만 찾아다니면서 살다 죽어도 행복할 것 같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음식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독일처럼 음식 불모지에 살면 정말 음식의 중요성을 느낀다.
2. 돈 있으면 누릴 수 있는 서비스가 무궁무진하다
내가 100억대 재산가라면 아마 하루 일과를 피부 관리로 시작한 후 필라테스를 하고, 마사지를 받으며 오후에는 맛집이나 카페 투어를 하며 고급스럽게 놀러 다닐 것 같다. 의료 시장 역시 포화되어 요즘 병원은 야간, 토요 진료는 기본에 의료진들은 천사마냥 친절하다. 좋은 병원은 (안 가봐서 잘 모르지만) 호텔보다 서비스가 더 좋단다. 돈만 있으면 입맛대로 병원 쇼핑도 할 수 있다.
돈만 많으면 24시 내내 불가능한 게 없다. 밤에 아이스크림이 사러 가기 귀찮다면 요즘 “부릉” 같은 배달 앱을 이용하면 된다. 스마트폰으로 손 하나만 까딱하면 된다. 독일도 요즘은 저임금 일자리가 많아져 배달 서비스가 도입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을 따라가려면 멀었다. 새벽 3시에 야식이 배달되는 나라는 아마 한국과 미국의 코리아타운이 유일하지 않을까?
독일은 행정, 의료 서비스는 속 터지게 느리고 불친절하며 업무 시간도 짧다. (대부분의 독일 개인 의사들은 수요일에 오전 진료만 한다. 주말 진료나 야간 진료는 그냥 응급실로 가는 게 낫다… 아프면 가서 최소한 4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3. 사람들이 우러러본다, 혹은 갑질을 할 수 있다
“손님은 왕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없다”라는 생각 덕분에 돈만 있으면 갑질을 할 수 있다. 혹은 갑질할 필요도 없다. 서울대 출신에 ‘사’자 직업이라면 타이틀만 말해도 사람들이 우러러본다. (나 자신도 아직까지도 외시 실패에 대한 엄청난 열등감에 시달리고 변호사, 의사, 고시 패스 공무원들을 보면 마냥 부럽고 멋져 보인다) 직업이 변변치 않으면 외제차 하나 끌고 다니면 된다. 나도 외제차 탄 사람은 부자라고 생각하고, 뭔가 부럽고, 막 대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독일이나 스페인, 남미 역시 잘 사는 사람들은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고, 최고급 승용차를 몬다. 국회의원과 청소부의 대우 역시 다르다. 하지만 한국만큼 직함으로 나 자신의 가치 혹은 대우가 결정되지는 않는다. 전 페루 회사에서는 청소부와 회사 임원이 점심시간이면 함께 회사 공동 공간에서 점심을 먹으며 수다를 떨곤 했다. 2017년이 되서도 경비원, 청소부 분들이 쉴 공간이 없어 화장실에서 끼니를 때우는 한국 모습과는 사뭇 대조된다. 일어서서 일하는 마트 계산원도 유럽과 남미에서는 본 적이 없다. 한국도 요즘 의자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손님이 오면 일어나야 하기 마련이다.
독자분들은 여기서 이미 눈치챘겠지만, “돈만 있으면 한국이 최고란 말”은 “돈 없으면 한국이 최고가 아니다, 혹은 최악이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물론, “돈 없으면 한국이 최악”은 절대 아니다. 빈부 격차가 어마어마한 남미, 아프리카에 비하면 한국은 가난한 사람들도 그럭저럭 살 만하고, 독일 같은 복지 국가에서도 복지 혜택 축소와 저임금 경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설 자리는 좁아져만 가고 있다. 그렇다면, 왜 유독 한국에서만 돈이 없으면 살기 힘들까?
돈 없으면 한국이 살기 힘든 이유
1. 개인 연락처 공개를 강요하는 한국 사회
독일 살다 오니 가장 큰 컬쳐 쇼크는 바로 개인, 특히 서비스직 종사자들의 휴대 전화 번호가 만천하에 공개된다는 것이다. 택배를 시키니 택배 기사님께서 손수 “택배가 XX시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문자까지 주신다. 심지어 “부재 시에는 연락을 해달라”고 적혀있다. 거의 개인 심부름꾼 수준이다.
독일 택배는 귀찮으면 그냥 우체국에 맡겨 버린다. 무거워서 일부러 인터넷으로 쌀 한가마니를 시켰는데 우체국에 맡겨 버릴 때는 정말 열 받는다. 택배 회사에 전화하면 “통화량이 많아 지금은 안된다 뚜뚜뚜뚜”가 답변이다. 택배 기사의 개인 연락처는 당연히 알 길이 없다.
독일이나 남미 모두 개개인 소비자를 1:1로 대하는 서비스직 종사자들의 경우, 그들의 업무용 전화라 하더라도 그들의 핸드폰 번호가 공개되지 않는다. 소비자들의 문의는 콜센터에서 일괄적으로 받는다. 업무가 분리되어 소비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편하지만, 이는 근로자 입장에서 업무를 덜어주며 그들을 불필요한 갑질로부터 보호한다.
독일에서는 일방적인 화풀이, 독촉 같은 갑질을 할 수 없다. 서비스 직원 개개인의 잘못이 아닌 이상 서비스가 늦거나, 다른 부서의 실수로 인한 잘못은 사과 한마디 없는 것이 독일 문화다. 독일에서는 점원들 역시 굉장히 퉁명하고, 불친절한 경우도 많다. 불필요하게 손님에게 머리를 조아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불평하려고 커스토머 서비스에 전화해서 따지면, “손님, 이건 내 잘못이 아니예요.”라고 하며 끊는 경우도 많다. 반면 한국은 택배, AS, 공무, 인터넷 혹은 에어컨 설치 등등 본업은 본업대로 하고 고객 서비스 일까지 처리한다. 일도 바쁜데 전화도 받아야 하고, 고객 만족을 위해 수시로 달라지는 고객의 요구에 따라 대응하니 일이 점점 불어난다. 이러한 말단 서비스직 종사자들은 금, 은수저 출신일 리가 없다.
참고로, 일반 회사에서도 개인 연락처나 카톡 혹은 왓츠앱이 공유되는 건 유독 우리나라가 심하다. 독일의 경우 회사에서 업무 관련성이 있고, 회사에서 핸드폰 비용을 내주는 경우에만 명함에 핸드폰 번호를 공개한다. 회사 내부용으로도 개인 번호는 공개하지 않는다. “혹시 주말이나 퇴근하면 급할 때 필요할 것 같아서 전화번호 좀 줘”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한국은 고작 80만 원 받는 인턴도 고객 관리직이면 심지어 착신 전환을 해서 강제로 그것도 24시간이나 개인 번호로 일을 떠넘긴다. 당연히 회사에서 핸드폰 비는 내주지 않았다.
2. 고객 만족을 위해 과로사하는 노동자들
근무 시간 기준으로는 OECD 선두를 달리는 우리나라. 그중에서도 택배 업무는 최고 수준의 근무 시간을 자랑한다. 무려 일주일에 70시간! 밤 열 한시에 택배가 오고 에어컨 설치 기사분이 오시는 게 일상이 된 이 나라는 노동자들의 무덤이다. 돈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초고속 서비스를 즐길 수 있지만, 이 뒷면에는 과로사하는 노동자들의 삶이 있다.
독일은 인터넷 설치만 해도 한 달을 기다려야 하고, 방문 예정 시각도 2~6시 등으로 정확하지 않다. 약속된 날짜에는 하루 종일 기사님을 기다려야 하고, 만약 부재 시에 방문하면 또다시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언제 오냐고’ 기사님께 전화조차 드릴 수 없다. 기사님 번호를 모르니까.
3. 안전은 돈 많은 사람한테만
근무 시간 이외에 OECD 1등인 통계가 또 있다. (심지어 멕시코, 터키보다 더 높다니) 바로 산재 사망률. 스크린 도어 수리 기사, 에어컨 설치 기사, 화학 공장 청소 노동자 등 많은 저임금 노동자들이 업무 중 목숨을 잃었다. 이 중 대부분은 하청 노동자로 ‘위험의 외주화’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빠른 문제 해결을 위해, 비용 절감을 위해, 복잡한 일이 싫어서 노동자들의 목숨은 언제나 2순위가 되고 만다. 치안은 멕시코보다 한국이 훨씬 안전하지만, 노동자의 근무 환경이나 안전 의식 수준은 멕시코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4. 아이를 낳는 순간 한국은 살 수 없는 나라가 된다: 죽으니까
심각한 경쟁으로 청소년 자살률 1위를 달리는 우리나라는 부자 아이나 가난한 아이나 똑같이 살기 힘들다. 하지만 가난한 아이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사고사로 죽을 것을 걱정해야 한다.
교통사고를 예로 들어보자. 최빈층 아이들의 교통사고 사망율은 최상위층의 3.9배이다. 이것 역시 멕시코를 제치고 OECD 1위다. 고급 아파트 단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걱정 없이 맘껏 뛰놀 당연한 권리를 누린다. 주차는 물론 배달 오토바이 역시 지하 통로에 해야 한다. 지상은 말 그대로 car free zone이다.
아파트 공원에서 노는 게 지겨우면 키즈 카페에 가면 된다. 시간 당 만원이 넘는 키즈카페지만 돈 많은 부모는 아이들의 재미와 안전을 위해 쉽게 지불할 수 있다. 등하교 길 역시 차를 가진 부모님이나 아니면 베이비 시터 분들이 해 주신다. 외출은 언제나 부모님 차를 타고 한다. 위험한 길거리를 혼자 걸어 다니는 일은 거의 없다.
반면 돈 없는 아이들은 인도와 차도와 구분이 없는 위험한 구역에서 놀 수밖에 없다. 공원도 없을뿐더러 공원까지 가는 길도 굉장히 위험하다. 인도와 횡단 보도에 불법 주정차를 한 차량은 아이들의 목숨을 위협한다. 부모님이 일 가시느라 등하교 길은 당연히 혼자이다. 아이들은 돈이 없어서 키즈 카페는 꿈도 못 꾸고, 마음 놓고 뛰어놀 수조차 없다. 뛰어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독일의 경우 모든 도로가 인도, 차도가 구분이 되어 있고, 횡단 보도나 인도에 오토바이가 주행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한다. 나는 한 번 자전거로 서행했다가 찰지게 욕을 들어먹은 적이 있다. 도시 내 공원도 많아서 굳이 키즈 카페를 갈 필요도 없다.
심지어 요즘 아파트들은 아파트 공간을 입주민에게만 개방하고 있다. 외지인들은 놀이터 시설 이용은커녕 통행도 하지 못해 길을 빙빙 돌아가야만 한다. 사회적 여론과 법은 대부분 입주민 편이다. 법적으로 사유지이므로 아파트는 합법적으로 외지인의 아파트 시설 사용을 제한할 수 있으며, 사람들 역시 ‘억울하면 돈 벌어서 아파트 사든가’로 일관한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그곳에 누가 살았는지, 그 주변에는 누가 사는지, 주변 주민들의 불편은 무엇인지, 아파트가 들어선 후, 주변 교통 상황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 이웃과 함께 사는 삶에 대한 논의는 1도 없다.
참고로 유럽에서는 이러한 폐쇄적인 대형 주거 공간 자체가 없다. 생각건대, 이런 주거 공간은 들어서기도 전에 엄청난 사회적 비판을 받고 계획 단계부터 물거품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5. 아프면 빚더미에 앉는 한국
한국 사람들은 한국 의료보험이 세계 최고라고들 말하지만, 큰 병이 걸렸을 경우에는 아무리 부자라도 재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많다. 감기 같은 잔병치레만 저렴하고 큰 수술, 입원 비용, 간병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실비 보험 하나씩은 들어 놓는다. 하지만 하루 먹어 하루 벌어 사는 돈 없는 사람이라면? 아프면 빚더미에 오를 각오를 해야 한다. 육체 노동자의 경우, 아플 일이 많지만 ‘유급 병가’의 개념이 없어 산업 재해 인정을 받지 않으면 직장을 관둬야 한다. (실은 무급 병가도 없다)
독일의 경우 MRI, 도수 치료, 암 수술, 간병인 비용 모두 의료 보험으로 충당할 수 있다. 1년에 60일까지는 유급 병가 기간이 나오기 때문에, 몸이 아픈 노동자들은 아픈 몸을 이끌고 혹은 목숨을 걸고 일자리에 나와야 필요가 없다.
6. 1,000만 원부터 시작하는 월세 보증금
이 전에는 굉장히 저렴했던 베를린의 집값도 많이 올라 베를린의 월세는 서울의 그것과 비슷한 수준이다(매매의 경우 베를린 집값은 서울의 약 40% 정도). 하지만 최소 1,000만 원부터 시작하는 서울의 보증금은 가난한 사람이라면 도무지 감당할 수조차 없다. 서울 중심이면 재개발 지역의 18평짜리 집도 보증금이 2억이다. 독일의 경우 대부분 관리비를 뺀 3개월 치 월세가 보증금으로 훨씬 부담이 적다. 남미나 스페인의 경우는 월세 1~2개월 치이다. 아마도 한국처럼 보증금 높은 곳은 전 세계에 몇 군데 없지 않을까?
서울과 베를린에서 똑같이 월급을 150만 원 버는 두 청년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베를린과 서울은 물가가 비슷하다) 베를린 사는 청년은 100만 원 보증금에 50만 원(관리비 빼면 30만 원) 짜리 집을 구할 수 있지만, 서울에 사는 청년은 1,000만 원이 없으면 1평 남짓한 고시촌으로 들어가야 한다.
전·월세 계약 역시 최소한 2년 마다 체결되기 때문에 계약 만료 때마다 집 주인은 임의로 월세를 올릴 수 있고, 월세를 내지 못하면 즉시 ‘내쫓긴다.’ 독일 역시 집주인 마음대로 월세를 올릴 수 있지만 임대차 계약이 1. 무기한이라는 점 2. 법적으로 1년에 올릴 수 있는 월세가 최대 6%로 제한되어 있기에 한국처럼 오른 월세 때문에 내쫓길 일은 훨씬 덜 하다. 오죽하면 한국에서는 조물주 위에 나는 건물주라는 말도 생겨났을까? 돈 없으면 인간의 기본 권리인 거주의 권리 역시 마음대로 누리지 못한다.
그럼에도 한국은
가난해도 그럭저럭 살만한 나라이다. 북한처럼 굶어 죽지도 않고, 시리아처럼 전쟁의 위협이 있는 것도 아니며, 미국처럼 총기 사건이 있지도 않다. 다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우리는 때때로 잊고 사는 건 아닐까?
원문: MultiKul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