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려준 재능을 뜻하는 ‘천재’는, 일반인에 비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를 뜻한다. 정확하게는 선천적으로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졌거나 언어, 수학, 과학, 철학, 예술 같은 영역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Genius라고 하는데, 이를 최초로 정의한 건 이마누엘 칸트다. 칸트는 Genius란 규칙을 새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규정했다.
혹여나 천재란 단어가 지구상의 소수를 위한 단어라 한다면, 피카소는 그 몇몇에 포함될 겁니다. 미술에 있어 그는 천재였어요. 옹알이를 하기 전부터 그림을 먼저 배웠죠(그가 말을 배우고 나서 가장 먼저 내뱉은 단어는 ‘연필’이었습니다. 저는 엄마를 부를 때요).
아무리 봐도 천재 냄새가 나는 아들의 실력이 궁금했던 아버지 호세 루이스(호세 루이스 이 블라스코, 1838-1913)는, 피카소에게 새의 다리를 그려볼 것을 시킵니다. 30분 뒤, 피카소가 가져온 그림을 보더니, 한참을 물끄러미 멍 때리다가 말합니다.
네가 내 꿈을 이루어다오.
피카소는 10대 초반부터 당시 유행하던 고전주의를 마스터한 상태였습니다. 바르셀로나 라 롱하 예술학교에 다니던 시절, 또래 학생들이 1달 정도 준비 기간을 두는 과제를 1일 만에 완성합니다. 그리고 1등을 하죠. 사실 입학시험을 볼 때부터 그의 천재성은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1주일이 걸리는 과제를 몇 시간 만에 완성하여 제출한 것이죠.
속으로 ‘넌 탈락이야’라는 생각이나 하며 과제물을 받아본 교사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14살의 수준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렇게 피카소는 입학하자마자 월반을 당합니다. 이후 20세가 되기 전까지 스페인에서 열리는 미술 콩쿠르를 훱쓸다시피 합니다.
약관의 나이가 된 그는 본격적으로 미술을 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넘어옵니다. 그러나 10대 때 누렸던 명성과 재능이,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누리던 것들이 전부 사라지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되면, 재기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떨어지는 높이에 따라 가슴에 구멍처럼 패이게 되는 박탈감 때문이죠. 이제 막 20살이 된 피카소에게 세상은 너무나 높은 낭떠러지였을 겁니다.
패배감이 가득한 현실이지만,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립니다. 자신보다 더 잘 그리는 화가들을 모방하면서, 가야 할 길을 찾습니다. 만들었다는 것이 더 적절하겠죠? 26살이 되자, 친구들에게 그림 하나를 들고 나타납니다. 입체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이 그림은 「아비뇽의 처녀들」입니다.
사람들의 시점이 아닌, 화가 자신이 보는 시점에 맞춘 큐비즘(입체주의)을 제안했을 때, 반응은 금방 냉장고에서 꺼낸 수박바 수준이었습니다. 냉담했죠(…) 특히 아버지 호세는 그의 그림을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서 좋은 학교 보내 놓았더니, 이해가 안 되는 그림들만 그리니 화가 났겠지요. 그런데, 평론가들과 대중의 반응은 그야말로 ‘대박’이었습니다.
피카소가 활동하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는, 산업화로 인해 급격하게 환경이 변화하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유럽은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트렌드가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피카소는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의 방식을 따라가느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후자를 택했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죠.
피카소는 보이는 대로 재현하는 전통방식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비뇽의 처녀들에, 기존 틀을 깨버리는 관점을 도입합니다. 앞, 옆 그리고 뒤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처녀들의 얼굴에 넣었습니다. 몸의 색깔, 모양도 왜곡하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미술에서 중요시되는 원근법은, Del 키를 눌러 휴지통에 던져버렸죠.
지금도 괴기스러운데, 당시 이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대단해~” 뭐 이런 감정을 한 번에 느끼기는 어려웠을 듯합니다. 반면에 피카소는 더욱 자신이 만든 규칙에 가까워짐을 느꼈습니다. 사람의 관점은 신체가 움직이는 각도에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공포영화 엑소시스트에서 귀신의 목이 돌아가는 것은,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우리 목은 그렇게 돌아갈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귀신이나 창조주(존재한다면)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상할 게 없죠.
피카소는 하루에 평균 7개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대중들에게 그는 즉흥적인 영감을 통해 작품을 만들어내는 천재로 기억됩니다.
그랬던 그가 죽은 뒤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밝혀집니다. 피카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된 수백 장의 크로키들은 하나같이 ‘아비뇽의 처녀들’과 흡사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잘 그리기 위한 연습이 아닌, 기존의 것을 잊기 위한 연습이었다는 거겠죠. learn이 아닌 unlearn. 배운 것을 잊는 노력 말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내리는 정의를 비웃듯이, 항상 예측 불가능한 방식의 그림을 만들었던 피카소. ‘정말 나는 이 세상 모두를 모방했다. 나만 빼고 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기 모방을 혐오했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매너리즘이 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미술에 대해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그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천재의 정의에 대해 얘기를 해볼게요. 천재는 선천적인 능력을 가졌거나, 여러 영역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많은 이들은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가진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나는 잘하는 게 없어’라고 결론을 내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잘 하는지, 잘 할 수 있는지 찾아보려는 노력부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무리는 피카소의 덕담 한마디로 끝내고자 합니다. 사실 이 글을 쓴 이유도 아래의 문장 때문이죠.
하지않고 죽어도 되는 일만 내일로 미뤄라.
Pablo Ruiz Picasso
1881.10.25 ~ 1973.4.8
원문: 용진욱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