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A의 이야기다. 그에게는 언제나 항상 다니는 3명의 친구가 있었고 그를 포함한 4명은 꽤 오래 사귀어 왔다. 갓 성인이 되었을 무렵부터 직장 가지고, 결혼하고, 산다는 것에 대한 푸념이 늘어나기 시작한 지금에 이르기까지, 각별한 마음으로 그들은 우정을 지켜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A가 내게 와서 말했다. 얼마 전, 그 4명 가운데 한 명인 친구 B와 한차례 심한 다툼이 있었고 그로 인해 관계가 완전히 단절될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다. 나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무슨 일이 있기에 10년 가까이 소중히 간직해 온 우정이, 단 한 순간에 이리도 허망하게 사라지려 한단 말인가?
문제의 발단은 축의금이었다. 마침 그들과 잘 알고 지내던, 친분이 상당했던 C 선배가 결혼을 앞둔 상황이었고 이 4명의 친구들은 함께 돈을 모아 의미 있는 선물을 사 주기로 했던 것이다. 다만 축의금 관련 논의에서 친구 B는 제외되어 있었고, 친구 B는 방침이 결정 난 이후, 친구 A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친구 B는 조심스레 난색을 표했다. C 선배와 자기 자신은 사실 개인적인 친분이 거의 없고 앞으로 만나 지낼 일도 없을 것 같아 그렇게 큰 금액을 축의금으로 선뜻 내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4명의 친구들은 식사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친구 B는 바쁜 일정이 있고 모임 장소로부터 거주하고 있는 곳이 매우 멀다는 이유로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나머지 친구들은 친구 B가 축의금 액수를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축의금 액수를 정해 일괄적으로 걷는 대신, 각자 그 선배에게 축의금을 내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모임이 끝난 후 친구 A는 친구 B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축의금은 각자 내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고. 그러자 친구 B는 친구 A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하던 대로 했을 뿐인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친구 A가 내게 하소연해왔다. 갑자기 친구 B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은 단지 친구들 사이에서 합의된 이야기를 전달했을 뿐인데 왜 자신이 이렇게 화를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도리어 화가 난다고도 했다.
그리고 축의금에 부담을 느끼던 것은 B였고, 각자 축의금을 내기로 얘기가 된 것은 오히려 그에게 좋은 결과이니 더더욱 화를 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잠시 생각해보고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전했다. 친구 B가 화를 낸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그는 아마 결과적인 ‘내용’ 그 자체보다는 그간 있었던, 그 내용이 전달되는 ‘방식’에 대해 불만을 품었을 수 있다고 말이다.
왜 당사자 가운데 하나인 자신의 의견을 묻지 않은 채, 나머지 친구들이 일방적으로 정하고 그것을 ‘통보’하듯 말하냐는 것이 친구 B의 불만 아니었을까? 처음 한두 번이야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자기 생각이 논의 과정에 반영되지 못하고 단지 논의의 결과들만을 일방적으로 전해 듣는 상황이 반복되니 결국 쌓이고 쌓인 것이 하필이면, 그 날의 ‘화’로 귀결되었을 터이다.
그 날의 ‘통보’야 다른 날의 ‘통보’들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을 것이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하필 그 날의 ‘통보’가 트리거(trigger)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뿐이다. 친구 A의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할 수 있다. ‘난 단지 하던 대로 했을 뿐인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도리어 불만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유의해야 할 것은, 본디 결과로 나타나는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라는 것이 단지 지금, 여기에 있는 원인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과거에 주목한다. 인간의 정신 병리 발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심리학자들은 전통적으로 환자의 과거 경험을 탐색해 보곤 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그 유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역시 환자의 과거 경험을 탐색하는 것을 주요한 치료 전략의 하나로 삼고 있었다. 심리학자들은 왜 개인들의 과거에 주목했을까? 그것은 바로 과거 속에,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생각들의 근원이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 모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당장의 원인들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기이한 생각과 행동들의 원인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대상자가 처한 지금 당장의 현실보다는, 무의식 속에 조금씩 쌓여 온 비교적 옛날의 기억과 감정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저 먼 옛날의 어떤 트라우마적인 사건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현재에 이르러, 누군가에게 어떤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항상 예의 주시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물론 과거라는 단 하나의 관점만으로는 인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은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존재이며 바로 지금 이 순간 어떤 선택을 해 나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소위 실존주의, 인본주의 기반의 심리 치료 기법들은 내담자의 과거보다는 지금 현재에 모습에 더 주목한다.
그러나 현재를 사는 인간의 행동 방침은 대개 과거의 누적된 경험들로부터 나온다. 기억의 흔적에 따라서든, 본능처럼 고착화된 습관에 의해서든 인간은 꽤나 자주, 과거의 경험에 기초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고른다. 그리고 과거의 경험으로 빚은 고정관념, 편견, 편향, 프레임 등으로 세상을 평가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산다. 어떤 한 사람이 지닌 생각의 근원을 알기 위해, 저 멀리 숨겨진 과거 경험들에 끊임없이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심리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연구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매개 분석(mediational analysis)이다. 원인이 되는 독립 변인이 결과에 해당하는 종속 변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가정 대신, 독립 변인과 종속 변인 사이 하나의 변인을 살짝 끼워 넣음으로써 독립 변인이 종속 변인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것이 곧 매개 분석이다.
매개 변인으로 이어진 경로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면 우리는 ‘독립 변인 – 매개 변인 – 종속 변인’이라는 연결 고리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로써, 독립 변인과 종속 변인 간 거리는 한 발짝 더 멀어지게 된다. 만약 매개 분석 모형이 보다 더 길어진다면, 독립 변인은 더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다. 독립 변인 – 매개 변인 A – 매개 변인 B – … – 종속 변인’과 같이. 이를 현실로 가져와 보면, 이제 종속 변인에 영향을 미치는 독립 변인의 존재를 눈치챈다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된다.
결론은 이렇다. 지금 당장의 원인들로 누군가의 생각과 행동이 설명될 수 없다면, 하던 대로 했는데 이전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는 보다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먼 과거의 어떤 사건들로부터, 어떤 매개의 과정을 거쳐 결국 오늘의 결과에 이르게 되었는지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한편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 왜 ‘신중하고’, ‘사려 깊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지금 당장 드러난 원인으로 그를 이해할 수 없다면, 성급히 감정적으로 대하기보다는 일단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상책이다. 혹시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과거의 어떤 경험들이 있기에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해보기 전까지는 함부로 어떤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억하자. 친구 B를 화나게 했던 것은 당장의 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트리거(trigger)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뭔가 더 놓친 것이 없는지 고민했어야 했다.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