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은 상당히 미시적인 학문이며, 따라서 주된 관심사는 언제나 ‘개인’이었다. 개개인이 지닌 마음의 구조와 기능은 어떠한지, 마음의 역동이 외부로 발현되는 행동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에 주로 초점을 맞춰 왔던 것이다. 초기 심리학 역사를 수놓았던 프로이트, 융, 아들러 등의 이론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도 역시 ‘개인의 성격 구조와 그 작동’에 관한 것들이다.
물론 융의 집단무의식이나 분트의 민속심리학 등이 보여주듯 사회문화적 맥락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사와 문화 등의 맥락을 초월한, 인간의 내면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기제들은 무엇인가?’ 당시 많은 심리학자의 관심사는 바로 그 점에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라는 맥락을 만났을 때 인간이 보여주는 생각과 행동은 혼자 있을 때와는 판이해지기 마련이다. 심리학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심지어 물리적으로는 혼자 있더라도 다른 사람의 존재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순간 인간의 행동은 사회적인 모습으로 변한다. 사회적인 요소를 무시하고서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사회심리학의 시작을 알린 학자들의 문제의식이었다.
‘상황의 힘’에 영향받는 인간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개인과 개인의 성격이 만나 만들어내는 독특한 상호작용 양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개인을 둘러싼 미시사회, 거시사회의 체계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며 각 영역은 어떤 방식으로 상호 교류하는가? 등의 질문이 심리학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심리학자들이 보기에 이 질문은 더 이상 부차적일 수 없었다. 사회심리학이 응용심리학이 아닌 ‘기초심리학’으로 분류되는 이유다.
애쉬, 밀그램 등 사회심리학자들이 대중 사회에 이름을 날렸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 기대되던 개인들이 상황 압력을 만남으로 인해 얼마만큼 비합리적인 존재로 둔갑할 수 있는지, 동조 실험, 복종 실험 등 그들은 그들 자신만의 독특하고 기발한 실험을 통해 그것을 증명했다.
선분의 길이를 비교하는 지극히 단순한 문제도, 전기충격의 영향으로 괴로워하는 이를 눈앞에 두고도 전기충격의 강도를 높여야 하느냐 낮춰야 하느냐는 뻔한 윤리적 문제도 상황적 압력에 따라 지극히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낱낱이 보여 주였던 것이다. 한편 우리가 상황의 힘에 주목해야 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남긴 이론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근본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다.
근본 귀인 오류란
근본 귀인 오류란 무릇 크고 작은 사건들의 원인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요인과 상황적 요인 모두가 고려되어야 함에도 상황적 요인을 무시하고 사건의 원인을 오로지 개인적 요인 탓으로만 돌리려는 인간의 경향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집단의 압력, 규범의 문제, 개인적 사정 등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 많음에도 단지 그 대상자의 성격 때문에, 혹은 그와 유사한 어떠한 기질이나 습성 때문에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는 바로 범죄 사건 발생에 대한 원인 해석이다. 범죄 기사를 읽으며 용의자에 대한 부정적·비판적인 의견을 형성하는 데는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는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함에도, 심지어 기사 내에서 단지 검사의 ‘구형’ 소식만이 담겨 있을 뿐 최종 판결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음에도 사람들은 벌써 용의자로 지목된 이에게 비판의 날을 세운다.
근본 귀인 오류는 왜 일어나는가? 이에 관한 몇 가지 설명이 존재한다. 우선 주목해볼 만한 것은 바로 자극의 ‘현저성(salience)’이다. 자신의 문제에는 ‘상황 탓’을 하고 타인의 문제에는 ‘사람 탓’을 하는 행위자-관찰자 편향(actor-observer bias)과도 관계있다. 자신을 볼 때와 타인을 볼 때 획득하는 정보의 비대칭으로 인해 사건의 원인에 대한 판단이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나 자신의 행위 원인을 추론할 때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므로 어떤 상황적인 요인에 처했는지 비교적 잘 안다. 그러나 타인의 행위 원인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만 비교적 잘 알 뿐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는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리하자면 타인의 행위를 판단할 때 우리가 주로 받아들이는 자극은 바로 행위자 그 사람의 정보며 상황 정보는 아는 것이 부족하다. 심리학자들은 바로 그런 이유로 근본 귀인 오류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근본 귀인 오류가 일어나는 다른 설명으로는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인 인간의 속성을 들 수 있다. 주의력, 사고력, 전략적 의사결정 능력 등 인간의 고차원적 정신 기능이 수행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양의 정신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
인간은 가급적 에너지를 보존하여 미래에 있을지 모르는 비상상황에 대비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정신적 에너지를 낭비하기보다는 고정관념(stereotype), 편견(prejudice), 휴리스틱(heuristic) 등 정형화된 생각의 틀에 의존해 에너지를 보존하도록 동기화된 존재라 할 수 있다.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개인적 요인에 의존하고 별도의 인지적/행동적 노력을 통해서야 얻어낼 수 있는 상황적 요인에는 ‘귀찮음’을 느끼는 것이 인지적 구두쇠 속성을 지닌 인간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행위일 수 있다.
근본 귀인 오류라고 비난해서는 안 되는 이유
인간은 근본 귀인 오류를 가지고 있다. 생존에 유리하여 진화적으로 남겨진 본능에 의한 것이든, 자극의 현저성에 관한 인지적 고려에 의한 것이든 인간은 상습적으로 근본 귀인 오류를 범한다. 심리학자들이 용어에 ‘근본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근본 귀인 오류가 존재한다는 일반적인 사실을 지적하는 것과 그것을 일종의 딱지로 삼아 타인을 비판하려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제삼자 입장에서는 어떤 사태에 대한 원인을 설명하고자 오로지 개인 내적 요인에만 치중하는 다른 사람을 보며 ‘근본 귀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뒷짐 지며 말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이든 상황 요인을 같이 고려하는 것이 합리적임에도 ‘너희들은 그렇지 못하다’며 결국 ‘잘못된 행위를 하고 있다’고 당위적인 일침을 가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로 상황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주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고려다.
즉 외부적 한계에 의해 만들어진 정보의 비대칭적 상황이 곧 근본 귀인 오류’처럼’ 보이는 현상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확실성을 회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또 다른 속성과 충돌되고 있진 않은가에 대한 고민 또한 필요하다.
본디 인간은 애매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손에 잡히고, 눈에 잘 띄며, 전후 관계가 분명한 것들을 좋아한다. 애매하고, 추상적이고, 완결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인간이 지닌 불확실성 회피(uncertainty avoidance)의 한 사례로 본다.
드라마가 한창 숨 가쁘게 진행되다 모든 떡밥이 회수되는 마지막 편을 방영하지 않는다면? 혹은 무수한 맥거핀을 남긴 채 드라마가 종영된다면? 매우 높은 확률로 시청자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그런 애매함을 인간은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한 번 흡입력 있는 서사에 빠지면 결론에 이를 때까지 인간은 쉽사리 그 호기심을 멈추지 못한다. 아무리 재미있는 작품이라도 연재 중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감상을 거부하거나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밤을 새워 시리즈를 정주행했다는 사례들은 불확실성을 회피하고자 하는 습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원인-결과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범죄 관련 기사를 볼 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비록 잠정적일지라도 기사를 다 읽은 개인은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나름의 설명 양식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게 판단 과정을 마무리한 후에야 편안한 마음으로 다른 사건에 관심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범죄에 관한 기사라면 더더욱 원인에 대한 추론은 완결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원인에 대해 조심할 수 있으므로. 마찬가지의 불행한 사건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도록 이해하고 대비할 수 있으므로. 근본 귀인 오류를 범했으니 잘못됐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이유다. 근본 귀인 오류를 범하는 것만큼이나 불확실성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 또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근본 귀인 오류’라 쉽사리 비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건 원인에 대한 판단이 다분히 유보적인 것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시 말해 판단에 이면에 자리한, 판단자의 속사정을 따져보면 우선 주어진 정보들 안에서 최선을 다해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잠정적 진실로 놔둔 후, 상황에 대한 추가 정보가 확보되면 판단을 수정하겠다는 유보적 자세를 취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판단자가 유보적 판단을 내렸는가, 최종적 판단을 내렸는가 여부는 잘 관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유보적 자세는 때로 근본 귀인 오류인 것’처럼’ 보이고 종종 합리주의자라 자칭하는 이들에게 공격을 당한다. 그러나 그들이 상황 정보의 중요성을 주장하며 판단을 보류하듯 유보적인 자세를 가진 이들의 상황 정보 또한 고려하려는 태도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보의 비대칭성이 근본 귀인 오류를 낳는 하나의 원인이라는 점은 근본 귀인 오류의 책임이 비단 판단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앞서 언급했듯 정보가 불균등하게 주어지면 주어지는 대로, 어찌 되었든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설사 그것이 유보적인 모습을 띠고 있을지언정, 불확실한 부분을 남겨두어 심리적 불편감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단 결론은 내려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본 귀인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서 판단자만 닦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황 정보가 주어지지조차 않았는데 어떻게 ‘근본 귀인 오류’를 안 범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어쩌면 판단 당사자가 아닌 정보 제공자의 문제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정보 제공자는 치우침이 없이 개인 내적 정보와 상황적 정보 모두를 최선을 다해 전달해줄 책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