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던 얘기 계속하겠습니다.
1974년 8월 15일도 역시 광복절이었다. 그 해 광복절에는 경사가 하나 더 있었다. 1호선 지하철이 일부 완공됨으로써 서울의 지하세계(?)에 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서울역에서 청량리까지를 달렸던 지하철의 탄생은 당연히 장안의 화제였고 대통령 각하께서 그 ‘시승식’을 거행하는 것은 더욱 응당한 일이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다른 양복짜리들이 다 서 있는 가운데 각하 혼자서만 자리에 홀로 앉아 감회에 젖어 계시는 모습이 나온다. 이때 시간이 11시 10분경. 그러나 각하의 머리 속에는 정말 별의 별 생각이 다 지나갔을 것이다. 바로 40분 전 자신의 아내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병원으로 실려 갔던 것이다.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혼수상태로 실려나간 후, 물 한 잔 마시고 “하던 얘기 계속하겠습니다.” 하며 끝까지 광복절 기념사를 읽어 내리던 모습은 박정희를 숭배하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신화가 되어 있거니와, 그 난리를 치르고도 바로 지하철 개통식에 참석해서 홀로 좌석에 앉아 있는 풍경은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키고도 남음이 있다.
육영수 여사를 쏜 사람은 재일교포 문세광이었다(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범인의 윤곽이 드러났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어쩌면 문세광을 불러들인 것은 바로 그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 하나 똑똑히 처리하지 못하고 말이야!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맞기 꼭 1년하고도 1주일 전, 1973년 8월 8일 일본에서는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일본의 호텔에서 김대중을 납치한 것. 어디 야쿠자를 시킨 것도 아니고 한국 외교관 신분의 요원들이 가세하여 치밀한 계획 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알았다고도 하고 몰랐다고도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면서 그 아랫 사람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충성 경쟁을 즐기던 박정희 대통령이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면 이런 식이 아니었을지. “이런 일 하나 똑똑히 처리하지 못하고 말이야!”
국내에서 벌어진 일이라면야 무슨 애국 단체 회원들이 납치해다 집에 데려다 놨다면 그만이었고, 시끄럽게 굴면 긴급조치 위반으로 잡아넣으면 끝이었지만 문제는 일본이었다. 정부도 정부거니와 일본의 여론은 한국을 무슨 야만족 취급을 하고 있었다.
허긴 야만족 소리 들어도 마땅한 일이었다. 남의 나라에 망명해 있는 사람을 자국의 정보요원들이 자루에 넣어 납치하는 짓을 저지르는 나라를 문명국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가뜩이나 조센징 소리에 지긋지긋한 재일교포 사회는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어이 조센징, 긴다이쭈(김대중)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 “나는 강꼬꾸징(한국인)이라고!” “그래 강꼬꾸징. 강꼬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응?”
유리창 청소부에서 권총 찬 암살자로
문세광은 조총련이 아닌 우익 거류민단 소속의 재일 한국인이었다. 정부에 따르면 골수 공산주의자로서 민단 분열을 꾀하려 위장 가입한 것이라고는 하는데… 하여간 그는 거류민단 단비 수금원부터 휴지 수집상, 유리창 청소에 이르는 궂은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 역시 김대중 납치 사건에 격노한 나머지, 김대중 구출을 위한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한국 영사관을 점거하고 그 직원들을 인질 삼아 김대중과의 교환을 요구하자.”는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골수 공산주의자였다는 한국 당국의 말이 맞다고 해도,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험한 일 마다 않고 일하던 그를 권총 찬 암살자로 만든 가장 큰 계기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쨌건 그는 많은 의혹 속에 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다. 렌트한 외제 고급 승용차를 타고 그 삼엄한 기념식장에 비표도 없이 들어가서는 연단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리고 육영수 여사는 이 날 세상을 떠났다. 청와대 내 야당으로 불리우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할 말은 했다는 영부인, 그래서 청와대 내부에서 ‘육박전’이라 표현되는 부부싸움을 자주 벌이기도 했으며,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여 주어 인기가 높았던 영부인은 그렇게 남편과 이별한다.
문세광이 부른 사람 ‘영애 박근혜’
그 뒤 여러 가지가 바뀐다. 일단 납치 사건 이후 일본에 완전히 수그리고 지내던 대일관계가 역전됐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재일 한국인의 범죄로서 사과할 일 없다”고 딱 잘랐지만 “일본에서 자란 미국인이 일본 여권을 가지고 미국에 가서 미국 대통령을 쐈다면 일본 정부가 그럴 수 있겠느냐”며 거세게 대드는 한국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고, 박정희는 “일본 폭격”까지 입에 담았다.
결국 일본은 자민당 부총재 시나 에쓰사부로를 진사 사절로 한국에 파견했고, 그는 박정희로부터 싫은 소리를 잔뜩 듣고는 “이런 모욕은 평생 처음”이라 하고 물러갔다.
그리고 하나 더, 이후 한국 역사의 분수령이 펼쳐진다.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영애’가 모친의 비극을 맞아 급거 귀국하고, 학업을 작파하고는 청와대의 퍼스트 레이디 배역을 맡기 시작한 것이다. 김운용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 ‘영애’가 귀국하면서 물은 것이 “휴전선은 이상 없습니까?” 였다고 한다.
문세광은 전혀 예기치 않았겠지만, 그가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으로 ‘영애’를 불러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