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꿈은 계속해서 변한다. 어릴 적엔 한 번쯤 ‘대통령’같은 크디큰 꿈을 가졌다가 철이 들어가면서 점점 더 현실적인 꿈으로 옮겨가기도 하고, 혹은 다방면에 관심을 두다가도 하나씩 경험이 쌓이면서 그 리스트를 지워나가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전자든 후자든, 우리의 꿈은 대체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작아지고 현실에 맞게 다시 재단된다.
학업을 끝낼 즈음 남는 건 주로 쪼그라든 꿈과 줄어든 선택지이다. 나 역시 졸업이 가까워 오면서 똑같이 그런 초조함에 시달렸다. 시간을 두고 멀리 바라볼 수 있을 때는 있는 힘껏 큰 꿈을 꾸고 거기에 맞춰서 나를 채찍질했지만, 졸업을 앞둔 어느 순간에는 냉정하게 나의 가능성을 판단해야 했다.
예를 들어서 굉장히 유창한 영어가 요구되는 외국계 투자은행들을 나는 어느 순간 과감히 포기해야만 했는데, 1년간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나름의 애도 썼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족한 영어가 단시간에 극복될 리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의 선택지를 줄이고 꿈을 줄이면서 때때로 형언하기 힘든 자괴감이 엄습해왔음은 물론이었다. 어디까지 뒷걸음질을 쳐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꿈은 작아졌을지언정 내 행복은 양보할 수 없었다. 양립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두 개의 욕심이었다. 이렇게 상충하는 두 개의 다른 욕심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나도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면접 스터디라는 것을 만들어서 차근히 취업을 준비했다.
면접이라는 건 늘 수많은 ‘왜?’라는 질문에 대답을 해나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항상 다양한 질문을 묻고 답하면서 준비했는데, 어느 날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나는 왜 열심히 사는가? 나는 언제 행복한가?
아무리 생각해내려고 애써도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나는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스터디까지 하면서 열심히 사는지, 도대체 나는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인지에 대한 솔직한 대답을 끈질기게 질문받았다.
대답을 솔직하게 할 수 없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몇 년치의 계획표를 세우고 잠을 줄여가면서 열심히 무언가를 꾸준히 해왔는데 나는 도대체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이라는 건 무엇인지 나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가뜩이나 쪼그라든 꿈과 좁아진 선택지로 마음이 허전한데, 억지로 없는 지원동기를 만들어가며 무기력하게 겉돌았던 것이었다. 나는 이 질문의 솔직한 대답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날, 나는 스터디를 접고 친구와 함께 면접용으로 꾸며진 대답이 아닌 한없이 솔직한 마음으로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스스로 끄덕일만한 만족스러운 대답도 찾았다. 나는 내 주변을 점점 더 좋은 사람들로 채우고 싶어서 노력해왔고,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떤 식으로든 좋게 인정해 줄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이날 이후 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동안 내 삶의 이정표가 되어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 항상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세상이 요구하는 행복의 기준 말고, 내가 진정 원하는 행복을 언제 얻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었고 덕분에 일반적이지 않은 나만의 회사를 고르는 기준 다섯 가지를 세울 수 있었다.
- 회사나 해당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는지
- 회사의 브랜드 가치가 높은지
- 나와 같이 일하게 될 팀원들로부터 내가 배울 것이 많은지
- 그리고 그 팀 내에서 나의 역할이 충분히 클지
- 일과 여가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지
이 기준으로 한때나마 취업률이 높은 공대 전공으로 몇 군데 보험성 지원을 해볼까 했던 마음을 접었고, 대기업에는 단 한 군데도 지원하지 않았다. 물론 대기업 지원의 필수품인 영어 자격시험도 응시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대기업을 바라보고 연봉이나 복지혜택을 줄 세우며 마케팅인지 영업인지 그런 직무들을 고민할 때 조금 다른 시각으로 나의 미래를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이 위험한 선택이라고 충고했지만 안 되면 1년을 더 준비하고 노력하겠다는 생각으로 매번 마음을 다잡았다. 합격하더라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그렇게 온전히 모든 시간을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쏟아부을 수 있었다. 덕분에 자괴감보다는 설렘이 더 가득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내가 언제 행복한지 스스로 잘 알 때, 꿈이 작아진다고 초조해하거나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내 손에 닿지 않는 불분명한 큰 꿈보다는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손에 잡힐듯한 크기의 분명한 꿈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내가 살고 싶은 삶,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해줄 내가 일하고 싶은 회사는 한 걸음 멀리 떨어져서 긴 호흡으로 그려볼 때 점점 분명해졌다.
원문: Jeremy Cho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