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회의》 448호 ‘어린이책, 어디로 갈 것인가’ 특집 중 과학 논픽션 작가 이지유 님의 글입니다.
아이들이 논픽션을 재미있게 읽지 못하는 이유라니. 이렇게 쉬운 문제가 어디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어른들이 논픽션 책을 어린이의 손에 들려줄 때 흑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숙제할 때 참고가 되라고 논픽션 책을 주고, 1년에 몇 번 치르는 시험에 좋은 성적을 얻으라고 틈틈이 논픽션 책을 보게 하며 과거에 살았던 위인들을 본받아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논픽션 책을 읽힌다.
논픽션 책에는 읽고 나면 무언가를 얻어야 한다는 목표가 늘 따라다닌다. 놀랍게도 이 글을 쓰기 위해 설문조사에 응한 어른들은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학습을 위해 논픽션을 읽힌다”고 대답했다.
어른이 문제다
이와 같은 어른들의 반응은 그들의 사고가 얼마나 비합리적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어른들은 동화나 시와 같은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에 대해서는 매우 고상한 기준을 제시한다.
문학작품은 다양한 인물과 사건 속에서 보편적인 가치를 찾아 서술한 것으로 읽다 보면 수많은 인생을 간접으로 경험해볼 수 있고 그와 함께 독자는 어떻게 하면 좀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지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이 과정이 매끄럽게 이루어지려면 독자를 빨아들이는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야 하므로 작가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어야 한다. 그리고 독자인 어린이들은 그 나이에만 유효한 감수성을 발휘해 동화를 재미있게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펴고 즐기면 된다.
문학에 대해서는 이렇게 바람직한 자세를 가진 어른들이지만 논픽션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서는 모두 이렇게 답한다.
“한 가지 지식이라도 익혀서 써먹어야지요!”
왜 똑같은 책을 두고 픽션을 읽을 때는 재미를 강조하고 논픽션을 읽을 때는 실용성을 강조하는가. 어른들이여,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교양도서를 읽고 얻은 지식을 써먹은 적이 있는지. 독서에서 얻은 지식을 이용해 실제 세계에서 이득 얻은 적 없는 어른이 무슨 근거로 그와 같은 일이 아이들에게는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자신들이 하지 못한 일을 어린이에게 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모두 바보들이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읽어야 하는 이유는 같다. 읽는 동안 재미있어야 한다. 또 자신이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다른 환경과 사건을 뇌가 재구성하게 해주어야 하며 그 결과 행복함을 느껴야 한다.
나아가 논픽션 책이 주는 효과는 지식의 구조를 파악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나 과학 같은 지식은 단숨에 생산되지 않는다. 지식은 앞선 지식을 발판 삼아 다양한 크기의 조각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려 수많은 탑을 쌓는 건축물과 같다. 우리는 조각을 위로 올리기 위해 사용하는 크레인의 꼭대기에 올라서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같은 눈높이에 있는 가장 최근에 생산된 지식만을 본다. 최신 지식은 여기저기 솟아 있는 탑과 같아서 언뜻 보기에는 이 지식과 저 지식이 별 관련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탑 하나의 근본을 찾아 아래로 내려가면 결국에 이 지식들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으며 크고 튼튼한 하부 구조가 없으면 빙산의 일각 같은 지식이 결코 나올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때로는 부실한 하부 구조 때문에 어느 구역의 탑은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이와 같은 방대한 지식의 구조를 깨닫는 것은 장편소설, 그것도 매우 긴 장편소설을 다 읽고 나서 그 작품이 구축한 세계를 온전히 깨달았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기쁨을 선사한다. 논픽션 책을 읽고 얻어야 하는 것은 작은 지식 하나를 외워서 시험을 잘 보는 것이 아니다. 바로 코앞에 떨어진 문제를 해결하려고 보는 것도 아니다.
역사와 과학 방법이 구축한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젖히는 경험을 하는 것, 그래서 그 세계에 빠져들도록 하는 것이 논픽션 책을 읽는 목적이다. 이런 깊은 뜻을 모르고 그저 숙제나 해가라고 논픽션 책을 주다니, 어른이 정말 문제다.
어른들은 왜 이렇게 되었나
어른들이 도대체 왜 이렇게 망가졌는지에 대한 답 또한 간단하다.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세태가 있고 그 경쟁에서 우리 아이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기심이 작동한다. 신자유주의가 춤추는 이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에 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입시제도라는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어린이와 청소년의 아름다운 시절쯤 미래를 위해 담보로 잡는 것은 당연하고 아이의 적성, 꿈, 희망 따위는 이미 고려할 사항이 아니다.
이런 부모들의 생각은 각종 참고서와 교과연계를 강조한 책의 판매량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난 1년간 나온 신간 가운데 온라인서점에 판매되고 있는 과학, 사회 분야의 논픽션 책은 얼추 1,500여 종이다. 그 가운데 70-80%의 책이 표지에 교과서, 학습, 선행, 수행, 자기주도 등 학습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의 용어를 쓰고 있다.
이런 책들이 잘 팔린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다. 잘 팔리니 출판사에서 이런 제목을 다는 것일 테다. 우선 책 제목에 ‘교과서’라는 단어가 있으면 판매에 유리하다. 제목에 이 책을 읽으면 학습에 도움이 된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참고서일까 교양서적일까. 두말할 것 없이 참고서다. 단행본인 것처럼 보이지만 참고서보다는 조금 고급스러운 보조 교과서에 불과하다.
이런 단행본은 10여 년 전부터 봇물 쏟아지듯 나오고 있다. 이 책들은 수십 권을 세트로 만들어 팔기 때문에 한 질을 구비하려면 제법 많은 돈이 드는데도 아이를 둔 부모들은 용감하게 지갑을 연다. 각종 포털사이트 블로그, 카페 등에서 교과연계 선행학습, 교과연계 자기주도형학습 등 다양한 이름으로 단행본을 엮어 정보를 주고받는 부모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부모들이 많이 모여드는 블로그나 카페에 책이 노출되면 판매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출판사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교과서와 연계되어 있음을 알리려고 애를 쓴다.
언뜻 보기에 이런 물결은 단행본 시장에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출판사에서는 괜찮은 단행본을 만들고 이 책이 교과와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 홍보하는 데 초점을 맞추다가, 이럴 바에는 처음부터 교과와 관련 있는 내용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자고 생각한다. 논픽션 저자와 기획자, 편집자는 교과서를 가져다 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책을 만든다. 결국 또 다른 참고서를 만드는 꼴이다.
이렇게 악순환이 계속되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책에 들어갈 글의 소재는 다양성을 잃고 개성 없는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교과서 내용을 억지로 끼워 맞춰 이야기를 만든 책들은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의도가 너무 드러나 있고 이야기조차 작위적이어서 아이들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그 결과 아이들은 학교에서는 교과서를, 집에서는 교양서적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또 다른 교과서를 봐야 한다. 재미있을 리가 없다.
이런 상황은 교과서를 집필하는 사람들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 과학, 수학, 역사는 늘 새로 발견된 지식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본 사실이 주요 내용이 되어야 한다. 또한 학생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기 위해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루어진 읽기 글을 제공해야 하는데, 국내 작가들이 쓴 글이 전혀 새롭지 않다면 교과서를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없다. 교과서 집필진의 가치관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논픽션 책을 교과 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용도로만 본다면, 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으로만 본다면 매우 곤란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지식의 구조를 파헤치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을 골라 교과서에 실어야 교과서의 내용이 더욱 풍성하고 다양해질 것이다. 그래야만 ‘교과서는 재미없는 책’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다. 이와 같은 흐름을 이용해 논픽션을 학습이라는 개념 아래 묶어 분류하는 온라인서점도 분류방식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논픽션은 학습을 위한 책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교과연계를 강조한 책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것을 사는 사람들은 교과서가 너무 어려워서 아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러는 것인데 뭐가 잘못된 거냐고 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만약 교과서가 어려워 아이들이 이해를 못 한다면 우선 가장 큰 책임은 교과서를 만든 사람들에게 있다. 그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 그것을 먼저 해야 한다.
만약 교과서가 쉽고 친절한데 아이들이 이해를 못 한다면 그것은 가르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숙제를 내주는 선생님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래도 아이가 여전히 과학, 수학, 역사를 어려워한다면 그 분야가 아이에게 안 맞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고서에 가까운 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책을 주는 것이 옳다. 만약 당신의 아이가 과학, 수학, 역사에 관심이 없다면 교과연계가 아니라 더한 책을 주어도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이럴 때는 둘러 가야 한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학습을 강요하며 논픽션 책을 주는 또 다른 이유는 어른들 스스로가 과학, 수학,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잘 모르는데 아이는 책을 보고 스스로 알아서 했으면 좋겠다는 목적이 강한 것이다. 일반인들의 과학에 대한 무지는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닌 듯하다. 여러 선진국에서는 20세기 중반부터 과학기술의 대중화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적용해왔다.
후에 과학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용어로 불리는 이 정책은 날마다 생산되는 과학지식을 일반인들에게 설명해줄 과학저술인을 양성하는 것으로 발전했고, 21세기에 이르러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공동체 문제해결 과정’이나 ‘공동체 의사결정 과정’이 과학기술지식을 공유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떠오르고 있다.
원자력발전이나 기후문제 등은 그와 관련 있는 과학지식을 공유하기에 매우 좋은 사안이다. 공동체는 과학지식을 공유하는 것은 물론 이 사안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정치, 경제, 역사와 관련지어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다. 그러니 부모들 스스로가 최근 사회를 달구는 핫이슈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그 이슈를 통해 과학과 철학, 역사 공부를 하며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이에게 책을 100권 읽히는 것보다 낫다.
여기서 아무리 떠든다고 교과연계를 염두에 두고 책을 만들던 사람들이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아동의 수가 줄고 경제는 어렵고 책을 팔아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출판사가 망할 것이니 당장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멀리 보면 또 다른 참고서를 만드는 일은 결코 출판사의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이 그렇듯 다양성이 확보되지 않은 사회는 멸종하고 만다.
멸종하지 않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의식을 바꾸는 일이다. 논픽션 책은 지식을 전달할 목적으로 만든 책이 맞다. 하지만 논픽션 책은 지식의 전달만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지식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보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어린이와 청소년의 책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앞에 있는 불만 끄다가 다 같이 절벽으로 떨어질지, 먼 곳에 있는 봉우리를 보며 다리를 놓을 궁리를 할지 그것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과 함께 살아야 하는 시대, 손바닥만 한 인공위성을 고등학생이 만들고 돈만 주면 그것을 우주로 보내는 로켓사업이 상용화된 시대, 누구든 달에 먼저 가 500m를 움직이면 300억 원의 상금을 받는 시대, 이런 시대에 우리 아이들이 살아남으려면 뭐가 중요할까. 지금 당장 보는 시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세계와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는 이 지구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구인이 되어야 한다.
이 좁은 대한민국에서 교과연계를 부르짖으며 책과 담을 쌓아서는 그런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아이의 학습에 대한 미련을 버려라. 출판사는 눈앞의 이득을 쫓을 것이 아니라, 다른 베스트셀러를 팔고 남은 이득을 투자해서라도 다양한 소재의 책을 만들어라. 서점은 작품성이 뛰어난 책을 제대로 큐레이션하라. 작가들은 새로운 세상에 온 몸을 던져 실감 나는 논픽션을 써라. 그래서 아이들에게 책 읽는 즐거움을 돌려주자. 그래야 다 같이 산다.
원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