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stion
재무팀 직원입니다. 팀 주요 업무가 예산 관리 및 승인이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부서에서 저희를 좀 어려워합니다. 팀 선배 중에는 일부러 조금 까칠하게 행동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아직 사원이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죠. 그런데 아무래도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될 것 같은데 행동거지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Answer
‘회사에서 힘 좀 쓰는 부서’에서 근무하시네요. 대체로 비서실, 인사팀, 재무팀, 자금팀, 기획팀, 운영팀 등이 힘 좀 쓰는 부서에 속합니다. 회사별로 명칭은 상이할 수 있죠. 이런 부서에 속한 분들은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타부서 눈치도 덜 보고요. 부서 중에서는 ‘갑’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20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갑’과 ‘을’의 지위를 반복했습니다. 국내 대기업으로 이직해서 첫 직장은 기획실이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그룹 내에서는 ‘사내 갑’이었죠. 다음 부서는 인하우스 컨설팅 조직이었으니까 ‘사내 을’이었고요.
첫 직장은 조폭 빼고 무서운 게 없다는 곳이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절대 갑’이었죠. 일화를 말드리면, 회사 건물 앞에서 주정차 위반 단속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저는 구청 교통지도과에 전화를 걸어 “회사 앞에서 단속하면 어떡하느냐”며 당당하게(뻔뻔하게) 항의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주 몹쓸 짓을 했죠. 당시에는 정말 조폭 빼고 무서운 분이 별로 없었습니다. 아, 있네요. 회사 선배. 사실 회사 선배가 제일 무서웠죠.
두 번째 직장은 컨설팅 회사였으니 가오는 살지만 ‘완전 을’이었죠. 제 신분(?)이 갑에서 을로 바뀌니까 사람들이 초면에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더군요. 제가 그동안 세상 물정을 너무 몰랐던 거죠. 그때 느꼈던 상실감이란… 이런 식으로 지난 20년간 갑과 을의 위치를 오가면서 느낀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갑의 힘의 원천은 개인 역량이 아니라 조직에서 비롯된다.
- 갑과 을의 위치는 언제든지 한순간에 뒤바뀔 수 있다.
- 갑에 익숙한 사람은 을이 되는 순간 별 볼 일 없어진다.
결국 누구나 ‘한때 갑’일 수는 있지만 ‘평생 갑’일 수는 없고, ‘상대적 갑’일 수는 있어도 ‘절대적 갑’일 수는 없습니다. 갑은 개인이 잘나서 된 게 아니기에 을이 되는 순간 별 볼 일 없게 되죠. 갑의 지위를 잃어버리는 순간 ‘할 줄 아는 일’이 없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니까요. 또한 갑으로서 을과 맺은 인간관계는 갑의 지위를 잃는 순간 함께 상실하게 됩니다. 갑이 아닌데 상대방이 나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간과한 채 갑으로서의 지위가 천년만년 갈 것처럼 행동하는 분이 많죠. 개중에는 자기 위치가 상대적으로 갑인지 을인지 분석해본 뒤 갑이라고 판단되면 갑처럼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마치 무슨 대단한 벼슬인 양 갑의 지위를 최대한 행사하려고 하죠. 심지어 자신이 갑이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넌지시 알려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상대방 더욱 을처럼 행동하게끔 하고 이를 은근히 즐기죠. 모두 인격이 성숙하지 않은 분들의 지지리 못난 행태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이렇게 갑질을 당한 을은 그 순간에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을의 의무’를 다할지 몰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응어리가 생기고, 이게 쌓이고 쌓이면 결국 갑에 대한 반감으로 바뀝니다. 당연하죠. 모두 자존감이 있는 인격체인데. 문제는 반감의 화살이 갑질한 개인뿐 아니라 그가 속한 기업 전체로 향하게 된다는 거죠. 결국 못난 직원 한 명의 적절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기업 전체가 손해 보는 상황으로까지 번질 수 있습니다.
갑과 을의 위치를 여러 차례 반복해온 20년 차 직장인으로서 어쭙잖은 조언을 드리자면 ‘갑일수록 을처럼 행동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비굴하게 굽실거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행동하면 상대편은 ‘이 사람 혹시 무슨 약점 있나?’라고 오해하고 오히려 우습게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상대편의 호의를 ‘약함’으로 보고 이를 악용하는 분들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이런 분들 역시 인격이 성숙하지 않은 분들이죠.
갑인데 을처럼 행동하라는 말은 요구할 것은 당당하게 요구하되 상대방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춰 불필요한 위압감은 느끼지 않도록 하라는 얘기입니다. 또한 갑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서 을이 갑의 업무를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 을로서의 본연의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라는 말이죠.
사람이 참 간사한 게 똑같이 예의를 갖추고 격식을 차리더라도 을이 하면 “싹싹하다”라고 하는 반면 갑이 그러면 “겸손하다”라고 얘기합니다. 겸손하다는 말 들어서 나쁠 건 없죠. 겸손은 미덕이고, 겸손한 사람은 모두가 높게 평가합니다. 겸손한 사람한테는 조금이라도 더 잘해주려고 하고요.
또한 대등한 인간관계는 오래가지만 상하관계로 맺어진 사이는 그때뿐입니다. 동갑내기 군대 고참을 길에서 만나면 그 순간에는 “병장니~임!” 하며 반가울지 몰라도 다시 만나 술 한잔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는 것처럼 말이죠. 따라서 갑을 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포지셔닝하면 그 관계는 더 오래갈 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갑을 위해서도 좋다는 말이죠.
한 사람한테 갑질하는 게 길어야 1~2년인데 그동안 갑질하면 뭐합니까? 장기적으로 좋은 사람 평가 듣고 인간관계 오래 유지하는 게 개인을 위해서 훨씬 더 좋은 것 아닌가요? 갑질하느라 소탐대실하지 마시죠. 그게 개인한테는 물론 그 사람이 속한 기업 입장에서도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쉽지는 않죠. 순간적인 ‘갑질의 유혹’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왜 그걸 모르겠습니까? 한번 폼 잡고 싶죠. 하지만 그건 다시 한번, ‘지지리 못난’ 생각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 또한 갑의 위치에 있을 때 갑질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갑질이 갑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갑은 을보다 금전적 보상이 적기 때문에 ‘갑질이라는 특권’이라도 행사하지 않으면 왠지 손해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거겠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참 어리석고, 바른 사회 구현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또 한 번 ‘지지리 못난’ 생각이었습니다.
Key Takeaways
- 갑의 힘의 원천은 개인이 아닌 조직에서 비롯되고, 갑을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갑에 익숙한 사람은 을이 되는 순간 별 볼 일 없어진다.
- 갑일수록 을에게 예의를 갖춰 불필요한 위압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고, 을이 본연의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라.
- 이렇게 행동하면 장기적으로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원문: 찰리브라운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