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New York Times에 Rachel Sherman가 기고한 「What the Rich Won’t Tell You」를 번역한 글입니다.
30대 후반의 뉴요커 비아트리스 씨는 점심을 먹으며 최근 고민 중인 두 가지 사안을 이야기했습니다. 별장을 어느 동네에 구입할지, 그리고 아이를 어느 사립학교에 보낼지에 남편과 의논 중이라고 말했죠. 이야기 끝에 고백도 이어졌습니다. 새 옷을 사면 보모가 볼까 봐 가격표를 바로 떼어버린다고요. 고급 베이커리에서 산 빵의 가격표까지 바로 떼어버리는 것은 라틴계 이민자인 보모와 자신 간의 경제적 불평등에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비아트리스 부부의 연봉은 3억 원에 가깝고 수십억 원에 달하는 자산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그녀는 6달러짜리 빵을 사 먹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불경스럽다’고 표현합니다. 최근 만난 한 인테리어 디자이너도 부유한 고객들이 비슷한 행동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비싼 가구를 들이면서 직원이나 가정부가 보지 못하도록 가격표를 꼭 떼어달라고 부탁한다고요.
이들을 만난 것은 부유층 소비 행태 연구의 일환입니다. 연구를 위해 자녀를 둔 부유층 50명을 인터뷰했습니다.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하는 이들은 금융 관련 업계에 종사하거나 수십억에 달하는 자산을 상속받았습니다. 소득이나 자산, 또는 두 가지 모두에서 상위 1-2%에 드는 사람들이죠. 경제적 배경은 다양하지만 약 80%는 백인입니다. 이들이 익명성을 원하기도 했고 제 연구의 일부이기도 한 만큼 이 기사에 등장하는 이름도 모두 가명입니다.
흔히 우리는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자 베블렌이 ‘과시적 소비’라는 개념을 들고나온 지도 어언 100년, 부유층은 늘 적극적으로 부를 드러내려는 사람들로 그려졌습니다. 현 미국 대통령은 그런 부자의 전형입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부자들은 스스로를 부자로 정의하는 데 대단히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모두 자신의 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죠. 스스로를 열심히 일하고 신중하게 소비하는 ‘보통 사람’으로 소개하면서 과시적이고 이기적이고 속물적이며 뻔뻔한 부자의 전형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이 부유한 뉴요커들이 자신을 ‘보통 사람’으로 묘사하며 ‘부의 낙인’을 피하려는 현상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들의 불편함을 이해하고 미안해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행동은 미국 사회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가려지고 정당화되며 유지되는 방식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사회적 계급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부유층만의 특성이 아닙니다. 미국 사회 전체의 규범에 가깝죠. 이런 규범으로 인해 미국인들은 계급이 중요하지 않고, 중요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지, 합리적으로 소비하는지, 기부는 하는지 등 부자 개개인의 행동을 기준으로 부유층에 평가 내리는 분위기 역시 경제적 불평등의 근본적인 질문을 덮어버리죠.
가격표를 가린다고 특권이 가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모가 고급 빵의 가격을 모른다고 해서 계급 간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할까요? 가격표를 가리는 행위는 부유층이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더는 데 도움을 줄 뿐입니다. 나아가 불평등이라는 주제를 터놓고 말하기 어려운 것, 그렇기 때문에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죠.
인터뷰를 하며 알게 된 것은 부유층이 아예 돈이라는 주제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전업주부인 한 여성에게 가족의 자산이 어느 정도냐고 묻자 그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도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런 건 ‘당신은 자위를 하시나요?’와 다름없는 차원의 질문이에요.”
남편과 함께 금융 업계에서 번 돈으로 500억 원 이상의 자산을 구축하고 100억 원짜리 주택에 사는 한 여성도 말했습니다.
“우리 부부가 얼마나 돈을 쓰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제가 구체적인 숫자를 알려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녀는 심지어 인터뷰가 끝난 후 연락해 익명성이 얼마나 보장되는지 거듭 확인했습니다. 배우자가 이런 정보를 남에게 알렸다는 사실을 알면 엄청나게 화를 낼 테니 인터뷰 사실 자체를 비밀로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맨해튼에 위치한 40억 원짜리 펜트하우스에 사는 한 부부는 우편물에 ‘PH(펜트하우스)’라고 주소가 찍히는 것이 민망해서 ‘PH’ 대신 층수를 표시해달라고 우체국에 특별히 부탁했다고 합니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또한 자신에 대해 말할 때 ‘부유한’, ‘상류층’과 같은 단어 대신 ‘형편이 좋은’, ‘운이 좋은’ 등의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심지어는 ‘수퍼 부유층’과 비교해 자신을 ‘중산층’ ‘중간쯤’으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이메일에서 ‘부유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인터뷰를 취소할까 생각했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진짜 부유층’은 개인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다니는 자신의 친구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라면서요. ‘부유함’이란 돈에 대해 절대 걱정할 일이 없는 상태인데 자신은 외벌이 금융업계 종사자로 수입이 들쑥날쑥하고 고용도 불안하니 진정한 부유층이 아니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미국 사회는 자본주의적 기업가들을 칭송하면서도 이들을 탐욕스럽고 무자비한 인물로 그립니다. 큰 재산을 물려받은 상속자들은 (특히 여성의 경우) 화려하지만 자기 자신밖에 모르고 제멋대로인 인물로 인식되죠.
역사상 불평등이 아주 심했던 시기에는 부정적인 면모가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제가 이 인터뷰를 했던 금융 위기와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의 시기 역시 국가적으로 소득 불평등이 크게 부각되었던 때였습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상위 10%가 소득의 50%를, 1%가 소득의 20%를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터뷰 대상자들이 악마화 된 1%의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은 부유층의 구성이 달라진 현상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20세기 내내 상류층은 매우 동질적인 커뮤니티였습니다. 대부분이 개신교 백인이었고, 소수의 가문이 몇 개의 클럽에서 함께 어울렸으며, 같은 엘리트 학교에서 아이들을 교육시켰죠.
2차 대전 이후 엘리트 교육 기관들이 보다 다양한 배경의 학생을 받아들이면서 상류층의 구성원 역시 훨씬 다양해졌습니다. 금융 업계 종사자들이 큰돈을 벌면서 전통적인 ‘일하지 않는 부자’ ‘귀족에 가까운 부자’와 대비되는 ‘열심히 일하는 부자’도 생겨났습니다. 열심히 일한 만큼 누린다는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죠.
‘정당한 부자’는 열심히 일하고, 또 현명하게 소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자신이 수입과 지출에 있어 모두 ‘보통’임을 강조했습니다. 남편의 연봉이 5억 이상인 주부 탈리아 씨는 아파트 두 채를 하나로 합치는 리모델링을 진행 중이고, 교외 별장을 빌려 사용 중입니다.
“우리는 그냥 일반적인 사람들이에요.”
무슨 뜻인지 묻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쎄요. 저녁은 다 같이 모여서 집에서 먹고, 밤에는 직접 아이들 목욕을 시키고, 아침에는 직접 등교시켜요. 매일 밤 별 4개짜리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직전 해에 6억 원 이상을 지출한 스캇 씨는 아내와 늘 “이게 6억짜리 라이프 스타일이야? 믿어져?”라는 말을 주고받는다고 합니다.
“항상 바쁘거든요. 정신이 없어요. 항상 아이들 먹을 피넛버터젤리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고요.”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보통 사람’과 달라지는 건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비싼 물건을 자랑하는 대신 할인 가격에 산 유모차와 할인점에서 산 옷, 오랫동안 타고 다닌 승용차를 강조했습니다. 호화 리조트에서 보내는 휴가 등 다른 부자들의 소비 행태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자녀 교육에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건방진 부잣집 아이’가 아닌 ‘좋은 사람’으로 키우기를 원한다면서요. 뉴욕의 사립학교만 다닌 아이가 ‘진짜 세상’ ‘온실 밖의 세상’을 모를까 봐 걱정하는 부모들도 많았습니다. 1,000만 원짜리 휴가를 다녀와서 “다음에는 다른 친구들처럼 개인 비행기를 타고 갔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 아이를 언급한 인터뷰 대상자도 있었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엘리트 교육을 받은 뉴요커들로, 사회적으로는 대부분 리버럴이라는 점입니다. 출신 지역이나 배경이 다른 부자들은 자신의 부나 지출에 대해 좀 더 편하게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인터뷰한 사람들도 어쩌면 비슷한 부자들끼리 있을 때는 좀 더 편해질지도 모르죠.
그럼에도 이들이 자신의 부에 취하는 태도는 아메리칸 드림의 중심에 있는 큰 모순을 드러냅니다. 부를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행동이지만 부를 소유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이죠. 평등주의에 대한 미국인들의 이상은 불평등의 수혜자에게도 불편함을 안겨줍니다.
이런 환경에서 개개인이 불평등이라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기란 매우 어렵죠. 이 모순 속에서 침묵은 매우 편리한 방편입니다. 돈 이야기를 터부시하는 사회적 통념을, 부자인 인터뷰 대상자들도 그대로 따르면 되니까요. 자신의 부를 감추고 부에 대한 마음속 갈등도 묻어둘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부의 낙인’을 피하게 됩니다. 열심히 일하고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면서 경제적인 지위는 그대로 유지한 채 넓은 의미의 ‘미국 중산층’에 속할 수 있는 겁니다.
부자들이 도덕적으로 칭송할만한가 아닌가 만을 따지는 사회적 분위기는 부의 재분배라는 중요한 문제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킵니다. 어떤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일하는가만으로 그 사람의 도덕적인 가치를 판단한다면, 이는 사람이 ‘가진 것’이 아닌 ‘하는 일’을 더 중시하는 가치관으로 이어집니다. 천문학적인 부자도 도덕적으로 선하기만 하다면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구조를 재생산하는 셈입니다.
리버럴과 좌파 사회 비평 쪽에서는 부유한 개개인이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지만,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불평등한 축적과 분배의 구조를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개개인의 도덕적 가치를 이야기하기보다 특정한 사회 구조의 도덕적 가치를 논해야 합니다.
당신은 천문학적인 부를 누리는 사람이 있어도 그 개인이 근면성실하고, 관대하고, 소탈한 사람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회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부자들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어도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용인하지 않는 사회를 원하십니까?
원문: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