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컴퓨터 폴더에서 이 글을 발견했다. 문서정보를 보니 2012년 12월 7일 작성된 글이다. 제목은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을 보는 후배 기자의 생각’이었다. 기억을 떠올려 보니 그때 진주에서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과 관련한 토론회가 있었고, 거기에 내가 토론자로 참석했었다. 기록 삼아 뒤늦게나마 올려본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을 보는 후배기자의 생각
1990년 기자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알게 된 이상한 사실이 있었다.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나 경찰의 보안수사대(대공분실)에서 발표하는 시국사건 수사 결과는 취재가 필요 없더라는 것이다. 즉 기자의 사실 확인 취재는 물론 일체의 보충 취재도 없이 그대로 신문에 발표 전문을 실었다. 따라서 기자가 기사를 쓸 필요도 없었다. 사진도 기관에서 제공해온 걸 그대로 썼다.
당시 신문은 12면 또는 16면이 발행되었는데, 세로쓰기였던 관계로 12면일 경우 10·11면, 16면일 경우 14·15면이 사회면이었다. 공안사건 발표는 10면이나 14면에 아예 한 판으로 실렸다.
내가 재직하던 신문사뿐 아니었다. 이웃의 다른 지역신문 지면도 다르지 않았다. 1991년 ‘지리산 결사대 사건(진주전문대 사건)’에 대한 한국 모든 언론의 100% 왜곡 보도도 이런 관행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런 일은 1997년 김영삼 정권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80년대 학번이었던 나는 신문기자가 된 후에도 이른바 ‘운동권’이라 불리는 친구나 지인들이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 공안기관에 연행되어 가면, 기자인 나에게 알아봐 달라는 부탁이 왔다.
그래서 경남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취재를 해봤다. 전화를 받은 경찰관은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여긴 기자들이 취재하는 곳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공안 사건과 관련해 직접 보안수사대에 전화 취재를 해온 건 내가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공포!
당시 신문사엔 사장부터 편집국장, 사회부장까지 모두 공안사건에 관한 한, ‘토를 달아선 안 된다’는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사상이 의심받을 수 있는 기사를 쓰거나 지면을 편집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문사 편집국을 짓누르던 이런 공포의 근원은 무엇일까? 거기에 ≪민족일보≫ 조용수 사형이 있었다고 본다. 신문이 권력자에 밉보이면 언제라도 용공·이적으로 몰려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나는 1990년대 말부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사건을 취재하면서 만나게 된 유족들로부터 한 가지 이상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 숙부를 억울하게 잃은 유족들이 보통사람보다 훨씬 반공·우익 이념에 투철하더라는 것이다. 심리적 가역반응이었다. 심지어 제주 4·3사건 희생자의 자녀들의 해병대 지원율이 훨씬 높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피해의식이었다.
문제는 이런 현대사의 야만을 아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얼마 전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 한 유력 대선 후보가 ‘판결이 두 개’라고 하여 언론의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그 이슈와 관련, 과연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래서 우리 ≪경남도민일보≫가 2012년 9월 이 사건을 다시 취재해 4건의 기사로 보도했다. 놀랍게도 지역에서 진보인사라 불리는 사람들마저 ‘그게 그런 사건인줄 신문보도를 보고서야 알았다’, ‘사형수 8명 중 5명이 경남사람인 줄도 처음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민간인학살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아버지를 보도연맹 사건으로 잃은 한 아들은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그 때까진 그야말로 보수·반공·우익 이념에 투철한 분이었다. 퇴임 후 아버지의 궤적을 찾아보니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던 분이었고, 해방 후 이승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노무현 정부 때 아버지는 서훈을 받았다. 그는 아버지 묘소 진입로 입구에 ‘애국지사 ○○○의 묘’라는 표지판을 세웠다. 그리고 아들뻘인 나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이렇게 나쁜 놈인 줄은 몰랐습니다.”
(안인영, 2006년 당시 7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