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사의 학생 성폭행 사건에 이어 이번에는 여중생 폭행 사건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사건의 공통점은 모두 어린 학생들이 관련돼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연 청소년들의 권리와 의무는 어디까지 인정되어져 하는가 하는 것이다.
한쪽의 극단에서는 청소년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필요가 전혀 없는 존재로 여긴다. 또 한쪽의 극단에서는 청소년도 성인과 똑같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여긴다.
이렇게 관점이 혼란한 틈을 타서 자기 멋대로, 자기 유리한 대로 일관성도 없이 잣대를 적용하는 일도 생긴다. 이 때문에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은 학생도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하는 반면, 여중생의 폭행 사건에서는 이건 어디까지나 애들이 한 일이며, 처벌에는 한계가 있다는 식의 얘기가 나온다.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면 전반적으로 말해 청소년들의 권리와 의무를 강화하는 쪽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이 제한 없이 학생이 모든 사안에서 성인과 같은 권리를 가지고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의 법과 윤리에서 생각하고 있는 기준은 시대에 아주 뒤처져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닐 포스트만이 이미 1994년에 발표한 유년기의 실종(disappearance of childhood)의 내용을 되새기는 것이 꼭 필요할 것이다. 닐 포스트만은 그 책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어린이와 성인의 구분은 읽고 쓰기가 보편화되면서 만들어진 문화적인 창조물이며, 보다 쉬운 미디어인 전자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붕괴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읽고 쓰기를 배우기 위해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을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자로 여기는 관행이 생겨나면서 어린이나 청소년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들이 정보를 습득하는데 있어서 읽고 쓰기가 가능한 성인과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비나 인터넷같은 전자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어린 학생들도 점점 더 많은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때문에 어른과 아이의 경계선은 점점 더 허물어지고 있다.
닐포스트만이 어른과 아이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생기는 일이라고 말한 것들을 소개해 보겠다.
1. 티비에서 아이같은 아이가 사라졌다. 오직 작은 어른들만 나온다. 그들은 어리고 작을뿐 행동과 말과 사고에 있어서 어른과 차이가 없다. 동요가 사라지고 아이들 노래와 어른 노래의 차이가 없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2. 반대로 티비에서 나오는 어른은 아이같아 졌다. 그들은 일을 별로 진지하게 여기지 않으며 아이를 키우지 않고 정치 이야기도 싫어하고 종교이야기도 싫어한다. 진지한 생각을 싫어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다. 대화를 길게 이어나가는 일도 없으며 8살짜리도 아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말하는 법이 없다.
3. 아이들 옷이 달라졌다. 어른들옷도 달라졌다. 즉 아이들은 어른 같은 옷을, 어른은 아이같은 옷을 입어 할아버지와 손자의 옷이 기본적으로 크게 차이가 없을때가 많다.
4. 아이들 놀이가 사라졌다. 즐기는 오락물에 있어서도 어른과 아이의 차이가 사라졌다. 아이들이 어른의 것을 볼뿐만 아니라 어른도 아이들의 것을 보고 즐긴다. 골목에서 아이들 놀이가 사라진것은 아스팔트때문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것은 아이들과 어른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아이들의 어른의 놀이문화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5. 아동 범죄가 크게 늘었다. 청소년 임신이 크게 증가했다.
이것은 한국의 현실이 아닌가. 닐 포스트만이 말하는 역사적 변화가 한국 사회와는 꼭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어린이와 어른의 구분이란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것이며 따라서 언제 어디서나 20세 이전에는 성인이 아니라는 식의 인식이 매우 낡은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성인과 아이의 구분은 생물학적인 한계를 가질 것이다. 나는 유치원생이 어른취급을 받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며 청소년들은 어느 정도의 의무와 권리의 제약을 미래에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청소년이나 어린이에 대한 낡은 개념에 정신적으로 태만하게 매달리는 동안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모순은 누적된다. 지금의 청소년이나 어린이가 겪는 사회적 문제의 상당 부분은 이 모순을 사회가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윤복희가 비키니를 입어서 사회적인 충격을 주었던 시대와 여중생들이 걸그룹의 일원으로 사방에서 활동하는 시대를 마냥 같은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게다가 권리와 의무의 문제는 흑백논리처럼 성인과 똑같이 혹은 다르게로 나뉘어 지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청소년이 더 많은 권리를 가지게 하고 또 그것에 책임을 지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권리와 책임의 내용을 보다 분명하게 해서 누구에게나 일관성 있게 적용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폭력의 가해자들은 당연히 법과 윤리를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적용하려고 뻔뻔한 언행을 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청소년을 마치 온전한 자기 결정권이 있었던 것처럼 주장하고 어떤 때는 그들은 인형처럼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처럼 말한다. 이런 혼란을 내버려 두는 것은 결국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무법 사회를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모로서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나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제발 성인이 되고 대학생이 될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기를 기도해야만 하는 심정이 된다. 잘난 척하는 어른들은 여러 가지 법과 윤리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오히려 어린 학생들은 실질적으로 그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중생 폭행 사건은 그런 현실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조폭은 나를 폭행할 이유도 별로 없고 폭행을 해도 신고를 하면 처벌받을 것이다. 나는 온몸이 피투성이로 폭행당하고 담뱃불로 지져지는 고통을 겪는다면 당연히 고소를 하고 처벌을 주장할 것이다.
내가 여성이고 집단성폭행을 당하거나 매춘을 강요당한다면 성인이었을 때보다 청소년이었을 때 더 많은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런데 낡은 관념으로 대처하고 있는 청소년 범죄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가하기 짝이 없다. 조폭한테 폭행을 당했는데 싸우지 말고 잘 놀라고 충고를 해주는 느낌이다. 어른이 그런 취급을 받는다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을 것인가. 그러니 부모로서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되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는 심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청소년 범죄의 문제는 어느 정도 고의로 방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사회적으로 법을 개정할 압력을 강하게 행사할 수 있는 부유층들은 자신의 자식들을 안전한 곳에 놓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이런 이기심 때문에 부동산 투기도 일어나고 가끔은 임대주택 아파트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못하게 해달라는 주장을 하는 부모들도 있어 사회적인 충격을 주기도 한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은 정작 보편적으로 적용될 법과 관행의 개정에는 소극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끔찍한 범죄를 내 자식이 저질렀을 때는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렇게 보면 이 문제는 보편적 복지의 붕괴로 여겨진다. 즉 특권층의 자녀만 안전하고 나머지는 정글 같은 세상에서 생존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식인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인가? 법을 개정하고 관행을 개정하는 것은 결국 성인들이다. 청소년들을 정글 같은 곳에 방치하는 일을 계속할 수는 없지 않은가. 청소년들에게도 성인대접이 더 필요하다. 권리도 그러하지만, 처벌도 그렇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