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회사에서 미친 듯이 바쁜 한 달을 보냈다. 인도 출장 일주일 후 바로 뉴욕 출장, 그리고 계속 연속해서 터진 크고 작은 일들을 수습하고 나니 벌써 5월. 그리고 4월에 처리해야 했던 업무들은 그대로 쌓여있는 슬픈 현실. 아무리 집에서 추가로 일을 해도 밀린 일들을 따라잡으려면 아직도 한참 남은 상태. 회사에서도 30분 단위로 온종일 미팅을 해서 엔지니어들과 추진해온 일들을 따라잡으려 노력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실제 업무를 처리할 시간이 없어 다시 업무가 쌓이는 무한 루프에 갇혀버린 요즘이다.
이런 나날을 보내다 보니 항상 미팅에 늦고, 회신해 달라는 이메일 처리도 밀리고, 계속해서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민폐 캐릭터가 되는 기분이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최근에 보낸 이메일들을 보면서 ‘미안해~’로 시작하는 답변이 많음을 발견하였다. ‘늦어서 미안해’, ‘빨리 답변 못 주서 미안해’, ‘내가 잘못 이해해서 미안해’ 등.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 못지않게 바쁜 친구들이 여럿 있는데 (오히려 더 심한 친구들도 있음) 그들에게 받은 이메일에선 나처럼 자주 사과하는 문구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나보다 더 회신이 늦거나 내용의 이해가 완전히 틀려서 내가 여러 번 교정을 해줬을 경우에도 되레 뻔뻔한 경우가 더 많았다.
이 현상을 조금 더 일반화해서 보니 (나를 포함한) 한국 사람들이 유독 사과를 많이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자신의 스타트업 아이디어나 제품에 대해 피드백을 요청하는 백인/중국/인도 출신 친구들은 자신의 요구에 대해서 당당한 반면, 한국분들에게 블로그나 페이스북을 통해 연락 오는 내용을 보면 사과로 시작하거나 끝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횡설수설 써서 죄송합니다’, ‘갑작스레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등. 무엇이라고 정확히 분석해서 묘사할 수 없지만 공손함과 예의를 표하는 방식이 ‘사과’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이런 사과의 남발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인지가 안 되겠지만 비한국인에게는 매우 소심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기에 다분하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의 ‘polite’한 의도가 남들에겐 ‘timid’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말해봐야 입만 아픈 당연한 이야기지만 실리콘밸리는 미친듯이 치열한 곳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좀 한다’ 하는 친구들이 모여서 모두가 자신의 아이디어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주장하는 곳이다. 회사도 그렇고 (승진의 길) 스타트업도 그렇다 (투자, 성장, 엑싯의 길). 이런 빡센(?) 동네에서 소심한 이미지는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사실이던 아니던, 비한국인이 보는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엔지니어의 평가는 대부분 ‘똑똑하고 말 잘 듣는데 조용하고 강한 주장이 없는 편이다’이다. 혹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사과로 예의를 표하는 문화가 이런 평가를 받는 데 일조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과를 덜 하고 소심한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문득 작년에 사과를 감사로 바꿔보라는 글을 읽은 것이 떠올라 며칠 전부터 의식적으로 평소에 사과할 만한 상황을 감사의 표시로 바꾸어 행동하고 있다.
- 늦어서 미안해 (Sorry for being late) → 기다려줘서 고마워 (Thank you for your patience)
- 잘 이해하지 못해서 미안해 (Sorry I didn’t understand) → 잘 설명해 주서 고마워 (Thank you for clarifying)
- 미안, 내가 틀렸네 (Sorry I was wrong) → 아,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옳바른 관점 고마워. (Ah, you’re right. Thank you for the right perspective)
실제 업무 효율이나 상대방의 태도가 바뀜은 아직 모르겠지만 더 이상 (서면으로/구두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니 이메일을 쓸 때, 그리고 미팅을 할 때 조금 더 자신감 있게 행동하는 것 같다.
당당함도 실력이다. 앞으로 더 의식해서 당당해지자.
원문: Andrew Ahn